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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리빙센스』 제35권 제9호(2024) 수록

    영혼을 비추는 빛

    색이 만든 햇살이 아른거리는 작업실. 벽면에 세워진 캔버스 위 색채들이 아침 햇살처럼 공간을 환히 비추고 있다. 따뜻하고 정다운 색이 넘실거리는 화폭을 보자마자 마음이 반응한다. ‘몽글몽글’이라는 부사를 작품을 통해 느낄 수 있다니. 이 온화한 곳의 주인은 화가 서승원이다. 주로 작은 규모의 작품을 그리거나, 학생들의 면담을 위해 활용하는 공간. 아담하지만 그의 작품 세계를 온전히 경험할 수 있다. 작가는 취재진을 위해 작업 과정을 보여주었다. 팔레트에 물감을 섞고 캔버스에 칠한 뒤, 그만의 터치를 위해 맨손으로 캔버스 위 물감을 매만진다. 손에 묻은 물감의 양을 조절하기 위해서 작업복 바지 위에 손을 쓱쓱 닦아가면서 말이다. 손으로 매만진 작품은, 그래서인지 더 부드럽게 느껴진다. 젊은 시절엔 구습을 타파하고 새로운 질서를 외치던 소위 ‘반항아’였다는 작가. 그 폭풍 같은 시절을 보내고 평온과 무념의 세계를 창조하는 현재의 서승원 작가를 만난 날.

    ⎯ Mark Tetto(이하 M): 어떤 유년 시절을 보냈는지 궁금합니다.

    서승원(이하 서): 저는 서울 태생이에요. 신촌에 있는 한옥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지금 이화여자대학교가 있는 동네예요. 그때만 해도 완전 시골 분위기였어요. 한옥의 기와, 창호문, 장독대, 마당의 봉선화 같은 것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는 풍경이었습니다. 그 장면들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어요.

    ⎯ M: 당시는 미술을 전공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서: 어릴 때부터 미술을 좋아했어요. 초등학교 때부터 그림을 잘 그린다고 칭찬받고, 학교 복도에 제 그림이 붙어 있곤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가 6.25전쟁 이후였고, 보리밥 먹기도 힘든 시절이었으니, 그림을 그린다고 하면 정신 나간 놈 취급을 받았죠(웃음).

    ⎯ M: 그래도 미술대학에 진학했으니 성공한 셈이네요. 전공은 무엇이었어요?

    서: 회화를 전공했습니다. 당시 미술대학은 서울대학교와 홍익대학교가 양대산맥이었는데, 저는 추상미술에 관심이 많아서 홍익대로 진학했어요. 그때 김환기 선생님이 일본에서 추상을 공부하고 한국에서 후배들을 양성하고 계셨죠. 그 새로운 시도에 동참하고 싶었습니다.

    ⎯ M: 어떤 새로운 것들을 경험했는지 궁금합니다. 아마 동양화, 서양화 중에 하나를 골라야 했을 것 같은데요.

    서: 회화를 한다고 하면 서양화 전공이었죠. 영어로 하자면 페인팅 painting. 하지만 그것이 서양의 회화라고 생각하지는 않고요. 당시 저는 동양과 서양의 화법보다는 헤게모니를 바꾸고 싶었어요. 제가 1960년도에 대학에 진학했는데, 그 해 4.19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정치적인 데모가 있었지만, 저는 그게 정치 뿐 아니라 우리 사회와 문화에 대한 데모였다고 봅니다. 사고의 혁명을 일으키고, 구습을 타파하고자 하는 젊음의 움직임이었죠. 제 친구들도 비슷한 생각이었고, 우리는 단체를 만들어서 우리의 생각을 세상에 알리기로 한 거예요 그 시작이 오리진이었습니다.

    ⎯ M: 오리진에서 활동하며 주로 어떤 작업들을 선보였나요?

    서: 처음엔 주로 회화와 판화작업을 했습니다. 그때 기하학적 추상을 시작했어요. 당시에는 기하학적 추상이라는 개념 자체가 굉장히 생소했을 때였죠. 그때 제 작품을 보고, 그림에 자를 대고 그린다고 비난하는 사람도 많았어요.

    ⎯ M: 기하학적 추상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신 거예요?

    서: 새로운 스타일의 작업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지만, 무조건 말도 안 되는 걸 그릴 수는 없잖아요? 내 안에 체화된 무언가를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이 예술이기에, 제가 살면서 경험했던 것들이 제 작품으로 만들어집니다. 제가 한옥에서 자랐다고 얘기했지만, 창살이나 대청마루와 서까래, 우리가 사용하던 목기들이 모두 기하학적 형태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내가 보고 자란 많은 풍경들이 기하학의 한 부분이었고, 그것들이 자연스럽게 작품으로 표출되었던 것 같아요.

    ⎯ M: 제가 한옥에 살아서 그런지, 작가님의 그런 경험들이 작품의 바탕이 되었다니 반갑습니다.

    서: 작가라는 것은 결국 자라온 바탕과 체질이 그 작품을 만든다고 보거든요. 서승원의 바탕은 한옥이지요. 사람들에게 제가 자라온 문화를 강요하는 것은 아니고, 제가 살아온 바탕을 기반으로 새로운 것을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 M: 기하학적 추상에서 한지를 중첩하여 붙이는 작업, 오방색의 추상, 그리고 지금의 부드럽고 여백이 느껴지는 작품까지, 작품의 흐름이 흥미롭습니다.

    서: 처음에는 무언가를 구축하려고 했습니다. 그 후엔 해체하고자 했고, 또 그 후에는 확산을 꿈꿨고요. 그게 제 삶의 궤도와 일치한다고 봅니다. 나이가 들어가는 나, 나의 인생을 작품에서 숨길 수가 없는 거예요. 젊었을 때는 패기가 넘쳤고, 학생들을 가르칠 때는 엄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파도에 바위가 깎이듯 내자신도 무뎌지더군요. 제 작품도 그런 시기들을 거쳐서 지금에 이른 거라고 봐요.

    ⎯ M: 작품이 작가님의 삶을 닮아가는 거군요.

    서: 그렇죠. 저는 그 현상을 이론적, 이성적 체계에서 자유와 감성에 의한 확산으로 넘어가는 거라고 해석했어요. 소위 묵념의 세계로 넘어가고 있는 거죠. 나 스스로도 인생을 성찰하면서 명상적 세계로 빠져 들어가는 거로 봐요. 이제 죽음을 앞두고 아무런 잡음없이 나 스스로를 바라보면서 그림을 그리게 되는 거예요

    ⎯ M: 삶을 향한 깊은 성찰이 작품에서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젊은이들도 작가님의 작품을 좋아하는 것 같고요. 특히 최근 작품들은 색감이 너무 아름다운데, 주로 그런 색들은 어떻게 떠올리세요?

    서: 아마도 제 추억의 색이 아닌가 해요. 저희 아버지가 편찮으셨던 겨울날이 유난히 기억에 남는데, 그날의 하늘이 참 파랬던 것 같고요. 분홍색을 보면 어린 시절 마당에서 봤던 봉선화 꽃이 떠올라요. 흰색은 햇살이 어른거리는 창호지의 색이죠. 어머니가 곱게 발라 둔 창호지에 구멍을 뚫던 장난꾸러기 시절도 생각나고요. 그 색들은 오랜 시간 제 머릿속에 남아있으면서 발효되거나 걸러지는 과정을 거치는 것 같아요. 우리 어머니들이 빨래를 하고 다듬이질을 했던 것 처럼요. 그냥 빨기만 해도 되는 것을 다듬이질을 하면서 더 공을 들이잖아요. 저는 그런 행위 안에 혼이 깃들고, 우리만의 색이 발현된다고 믿습니다.

    Mark Tetto 진행, 심지언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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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비평가 이일과 1970년대 AG 그룹』, 안그라픽스(2023)

    ⎯ 정연심(이하 정): AG 그룹의 설립동기와 그리고 선생님께서 어떠한 경로로 AG 그룹에 참여하게 되었는지 설명해주세요.

    서승원(이하 서): AG 그룹은 1969년에 결의가 되었고, 1970년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첫 전시를 했습니다. 당시 시대적인 상황은 앞서 1960년대 전후에 우리나라 미술은 한편에선 국전을 중심으로 하는 아카데미즘 미술이 굉장히 번성하던 때였고, 또 한편에서는 그것에 저항하는 흐름으로 앵포르멜 미술이 굉장히 지배적으로 돌출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그와 다른 하나의 실험적이고 도전적인 미술이 한국 현대미술에 필요하지 않겠나 생각하는 절실한 젊은 사람들이 의기투합하여 1963년에 처음으로 오리진회화협회를 결성했습니다. 홍익대학교 재학생 9명이 주도했고, 하나의 과거의 미술, 소위 아카데미즘 미술과 앵포르멜 미술에 대한 저항, 그리고 새로운 미술에 대한 시대적 요구를 담기 위한 미술을 지향했습니다. 그렇게 오리진의 회화전시는 처음으로 “기성세대에 도전하고 새로운 미술을 구현한다”는 캐치프레이즈로 시작을 했죠.

    그 다음에 1967년도의 단일화된 팀보다는 좀 더 다원적인 어떤 것이 필요치 않겠는가 하는 목적으로 신전, 무동인, 오리진이 합쳐 《한국청년작가연립전》이라는 것을 개최했습니다. 그런데 참여자 전부가 홍익대 졸업생이었어요. 그래서 저희들이 생각하기에 홍익대학교 졸업생만이 새로운 미술에 도전하거나 새로운 실험성을 찾기보다는 한국 현대미술의 폭과 미래를 위해서, 그리고 한국의 모든 젊은 작가들이 함께 모여 새로운 도전을 실험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하는 뜻에서 다시 AG 그룹을 결성해서 모였던 것이죠. 그래서 평면작업을 한 작가, 실험적인 이벤트를 하는 작가, 물성적인 것을 하는 작가, 그리고 어떤 현실적인 것을 다루는 작가... 모든 한국의 작가들을 다 모아서 결성을 했습니다. 결성을 하니 작가들만 모였기 때문에 “이것은 아니지 않느냐. 우리 한국미술에서 새로운 시도를 위해서는 이 작가들의 예술적인 어떤 정신이나 행위 같은 것을 이론화 할 분이 필요하지 않겠느냐”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이론가, 평론가들을 찾기로 했고 이일 선생님하고 오광수 선생님, 그 다음에 김인환 선생님 이렇게 세 분이 합류했죠. 그분들이 적극적으로 호응해서 작가로서의 실험성을 이론적으로 구축해주었습니다.

    모임의 이름을 AG(Avant-Garde), 한국아방가르드협회로 했습니다. ‘첨단적인, 전위적인 미술을 하자’는 뜻에서 나온 거죠. 서구의 바우하우스와 같이 우리 스스로 한국 현대미술의 집단적인 행동을 하자 해서 결성했고, 모이고 나서는 한국현대미술계 최초로 무크지를 만들었습니다. 무크지는 그 어떤 도움도 받지 않고, 그냥 작가들이 돈을 모아서 만들었어요. 책에는 한국 현대미술에 대한 소개 또는 해외미술에 대한 소개, 번역물 그리고 작가 소개 등을 실었고, 이것을 이일과 오광수, 김인환 선생님이 맡은 거죠. 그래서 작가와 평론가와 저널리스트가 모여서 만든 책은 『AG』가 가장 아마 한국 최초가 아니겠는가 생각합니다.

    ⎯ 정: 당시 출품한 작품과 주제를 설명해 주시겠어요?

    서: 《AG전》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최했는데 그 당시 국립현대미술관은 현재의 경복궁 민속박물관 자리에 있었습니다. 전관을 빌릴 수 있었는데, 작가들이 그때까지 볼 수 없었던 실험적이고, 도전적이고, 경험할 수 없었던 어떤 새로운 미술 작품을 냈죠. 저는 오리진 시절부터 타블로를 고집하고 있었는데, 우리의 것이 무엇인가를 굉장히 고민했어요. 우리 정신, 한국적인 정신이 무엇이냐. 우리가 갖고 있는 정체성에 대한 것을 가장 고민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당시에 우리의 상징적인 많은 것 중에 창호지를 갖고 나왔습니다. 창호지를 정신의 표출로 보고, 그것을 한 작품에 한 장 붙이고 두 번째는 두 장 붙이고, 그걸 14장까지 붙여 전 호를 창호지만으로 작품을 만들었죠.

    창호지라는 것은 백의민족이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의 흰색’을 가리키고, 또 하나는 우리의 가옥에 우리의 얼이 들어가 있는 것을 빼놓을 수 없거든요. 창호지를 가지고 우리의 어떤 의식과 정체성을 드러내려고 했던 것이죠. 그때 그것이 센세이셔널 했고 이번에도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그 작품이 선정되어 교류전에 내기로 했었지만 작품이 14점이다 보니까 홀을 다 차지할 수 없어 빠지긴 했어요. 아무튼 “우리의 어떤 정신을 오브제로 표현하는 것을 처음 시도했으며 물성적인 새로움에 도전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연이어 전시를 하면서 한지로 우리 민족이 가진 억눌린 한에 대한 것. 우리 어머니가 가졌던 그 한의 맺힘. 또 우리가 풀어야하고 가져야 하는 한의 풀이... 그런 해석을 의미하는 종이를 긁어서 찢어서 한풀이를 한다든가 흰색으로 흰색이 아닌 새로운 어떤 변화를 준다든가 하는 오브제 작품을 연달아냈었습니다.

    ⎯ 정: 당시 선생님은 기하 추상도 작업했잖아요. 그런데 왜 기존의 '선생님 작품' 하면 잘 알려진 그 기하 추상을 내지 않고 《AG전》에는 한지 작품을 내기로 했나요?

    서: 과거에 현대미술 운동을 하던 선배들의 앵포르멜 미술 운동이나 아카데미 미술 운동에 저항하며 새로운 미술의 도전과 실험 정신을 끌어내려 했던 오리진의 회화 운동이라는 것 자체가 기하학적 추상이었습니다. 제가 기하학적 추상 운동의 선구자라고 평가해주고 있습니다마는, 기하학적 작품을 평면으로 하면서 이제껏 그림이 과거의 그림이 거의 다 어둡고 캄캄하고 뻘겋고 이랬다면, 우리 때 와서 밝고 도식적이고 하얗고 노랗고 한국의 초기 오방색에서 나오는 그런 색을 처음으로 도입한 기하학적 추상을 했던 것이죠. 그때 매스컴에서 크게 다루었던 것이 처음으로 “하얗고 빨갛고 노랗고 자로 대고 그리는 그림”이라며 이것을 아주 경이적인 것으로 보도했어요. 그런 미술을 처음 봤기 때문에.

    한편으로 예술은 다양해야 하는 것이고, 정신은 확대되어야 합니다. AG에 합류할 때는 좀 더 과감하고, 좀 더 뛰어 넘는 실험미술이 필요치 않겠는가 생각했어요 AG에서는 오방색의 한국적인 정신을 조금 더 물성적인 것, 오브제로서 새롭게 도전하기 위해 그런 작업을 끌어냈던 것이죠. 그것을 어떤 확산적 행위로 해석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 정: 선생님은 당시 젊은 작가로서 참여했는데요. 당시 관객들의 반응이나 사회적 분위기는 어땠나요?

    서: 1970년도는 정치적으로 모든 것이 자유롭지 못하던 시절이었어요. 그리고 경제적으로는 굉장히 가난하던 때였고 재료도 없었고, 자유로운 표현을 하기 위한 물감이나 모든 것을 구하기 굉장히 힘든 때 였어요. 또 살기가 어려운 때였죠. 그때 미술에서 도전한다는 건 극히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런 시절에 현장을 이용해 새로운 미술을 내놓으니까—예를 들어서 이강소 같은 경우 닭이 움직인다든가, 신문지를 쌓아 놓는다든가, 통 같은 물건을 그대로 둔다든가, 종이를 내걸고 찢어 놓거나 해서—일반인들은 도저히 이해를 할 수가 없었죠. 사람들이 “이게 무슨 미술이냐 미친 짓 아니냐. 도대체 젊은 애들 이해를 못하겠다”고 했죠. 여태까지 못 보던 것을 보게 된 거니까.

    근데 오히려 미쳐야 된다고 봐요, 예술은요. 미친다는 것은 한 번 돌아가서 어떤 도전이라는 것을 실천하면서 남이 안 들어간 경지로 빠져 들어가고 남이 못 하는 것을 해보는 것이죠 이제껏 없던 것을 우리가 한 번 실현해보겠다는 그 의지가 예술적 정신이라고 저는 보거든요. 그래서 그때 전시도 그런 것을 했던 것이죠. 그리고 아까 무크지도 언급했지만 그땐 책을 마음대로 발간해서 판매할 수가 없었습니다. 인쇄도 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그 책을 보면 제한 부수로 해서 비매품으로 만들었어요. 그만큼 통제가 심했던 때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당시의 『AG』 구하는 걸 힘들어 하는데, 그건 뭐 시대적 산물인 것이죠.

    ⎯ 정: 『AG』에서 비평가 이일의 역할이 컸는데요. 그래서 선생님 글도 많이 실렸고요. 그래서 이일 선생님과 어떤 교류를 했고 또 어떤 에피소드가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서: AG 운동을 하면서 평론가를 모시자 이야기가 나오던 때, 이일 선생님이 프랑스에서 미술 공부를 끝마치고 한국에 돌아왔어요. 돌아와서 해외의 새로운 미술을 처음 알렸는데, 번역지를 내고 책을 소개하고 신문에 기고하는 등 서구 현대미술계가 어떻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젊은 사람들이 이해하도록 많이 도와줬습니다. 당시 홍익대에서 강의를 통해 최초로 서구 미술을 알려주며 우리에게는 굉장히 우상적인 존재였던 거죠. 이일 선생님은 한국 현대미술에 기여도가 높았어요. 자생적으로 성장한 분들로 오광수 선생님과 김인환 선생님이 있는데, 이일 선생님 같은 경우 우리 현대미술에 제일 기여도가 높은 분이라고 봐요. 지금은 유학을 다녀온 분이나 해외 출신이 많은데, 그 당시는 있을 수 없던 존재였거든요. 새로운 미술을 소개하며 경이로움을 우리에게 알려줬고 “서구의 미술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다. 어떻게 변화하고 있다. 이 정신 속에서 깨어나야 된다”는 것을 가르쳐준 분이었죠. 그래서 이일 선생님은 제가 보기에는 평론가로서 1세대라는 표현이 맞을지 모르겠지만, 공로가 크고 위대한 분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뭐 선배님에게 평가한다는 표현이 이상하지만요. 또 하나, 이일 선생님의 글은 굉장히 이해하기 쉽고 간략하면서도 글과 어휘 자체가 아주 통찰력 있었어요. 그리고 작가의 글을 이해시켜준다든가 해석하는 것을 넘어서 선도적인 글을 많이 실어줬어요. 작가들의 비평론, 평론만 다루는 게 아니라, 그 시대 돌아가는 것들을 현대미술론화 시켜 많은 저서, 저널, 보도와 강의를 통해서 우리에게 일깨워 준 분이기에 저는 아주 훌륭한 평론가로 꼽고 싶습니다.

    ⎯ 정: 1974년 《서울비엔날레》를 끝으로 AG가 와해되었는데요. 그럼에도 우리가 여전히 AG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AG가 한국 현대미술에 미친 기여나 영향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서: AG, 즉 아방가르드 운동은 우리가 현대미술이라는 걸 이해 못 했을 때, 현대라는 글자를 쓸 수도 없었을 때, 또 과거의 미술에 젖어 있던 때, 또는 과거의 의식에 집착했던 때, 그것을 이해하려는 시도도 안 하던 때, 우리 위세대가 앵포르멜을 통해서 저항적인 미술을 할 때 시작되었습니다. 우리가 이끌었던 아방가르드 운동은 그것을 뛰어넘는 실험적이고, 도전적이고, 한국현대미술사에서 여태껏 없던 미술의 르네상스라고 저는 평가하고 있습니다. 당시 그런 행동이 없었다면 “과연 우리가 의식의 변화를 가지고 올 수 있었던가” “양식의 변화를 가지고 올 수 있었던가” “미술 역사에 대한 시대적 조망, 또는 작가를 위한 어떤 방법론이나 작가들이 모여 힘을 쌓아 올려 농축시킨 것을 할 수 있었을까”라고 의심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에 그러한 행위들이 있었기에 훗날 폭발적으로 일어나서 많은 젊은 작가들이 따르고 동참하면서 현대미술을 이끌어 왔습니다. 그 잠재력 속에서 우리 현대미술이 만들어지며 생성되고 발전되며 변화되고 변혁되면서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가장 크게 기회를 주고 계획을 하고 기여를 했던 것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연심 진행

  • ✦ 『서승원: 동시성—무한계』, PKM Gallery(2021) 수록

    ⎯ 윤진섭(이하 윤): 서승원 화백은 기하학적 추상의 개척자이자, 단색화의 대표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근래에는 구겐하임 미술관에 서 화백의 작품이 소장되는 등, 1975년 도쿄화랑의 《한국 5인의 작가, 다섯 가지의 흰색》전 이래로 주목받기 시작한 단색화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가로서 그 입지를 더욱 견고히 다지고 있다. 피케이엠갤러리의 개인전도 그 연장선상에서 기획되었다고 보는데, 본 전시를 맞이하는 소회는 어떠한가.

    서승원(이하 서): 이번 전시는 나 자신을 정리해보게 되는 역사적인 의미가 있다. 올해 여든을 맞이한 내가 현재까지의 작업 활동을 결산하려 하니 감회가 새롭다. 특히 초기 회화 작품 외에도 그동안 국내외 각종 초대 단체전에서만 발표하였던 드로잉과 판화 작업까지 선보이려는 피케이엠갤러리 박경미 대표의 의욕적인 전시 기획에 감사할 따름이다.

    ⎯ 윤: 이번 전시에서는 1970~1980년대 그리고 2000년대 이후 최근작에 이르는 회화 및 드로잉 작업, 1960년대부터 제작되었던 판화 작업이 선보여진다. 그동안 판화 작업은 개인전에 출품한 적이 없지 않은가.

    서: 나는 20대부터 회화와 판화 작업을 병행했다. 1967년에 창립된 한국현대판화가협회의 창립 회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번에 특별히 판화 작업도 전시하게 되어 나로서는 아주 뜻깊다.

    ⎯ 윤: 1967년이면 공교롭게도 《청년작가연립전》이 중앙공보관에서 개최된 해이지 않은가. '오리진' 그룹의 일원으로 본 전시에 직접 참여하며 앵포르멜과는 다른 탈평면 미학을 추구했다. 당시 4.19 신세대로서 어떤 바람이 있었는가.

    서: 1960년 대학에 입학했고 같은 해 4.19 혁명이 일어났다. 정치적 사건이긴 하나, 나에게 4.19 혁명은 굉장히 의미가 깊다. 그 시기를 맞이한 젊은이들은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과 과거의 부패에서 벗어난 새로운 가치의 정립을 갈망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아래 대학 생활을 하면서 나 역시도 미술의 변화와 미술에 있어서 창의성의 회복이란 무엇인가를 늘 고민했다. 당시에는 앵포르멜이 한국 미술계를 지배했고, 현대의 주류 미술로 알려져 있었다. 선배들에게 야단을 맞으면서도 나와 함께한 대학 동료들은 앵포르멜에 도전하는 미술을 창의하기 위하여 1963년에 '오리진'을 결성했다. '오리진'은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깊은 성찰을 바탕으로 무질서에서의 질서, 혼돈에서의 자유, 자기 회복 등을 추구하는 회화 운동이었다. 

    1963년에 첫 전시를 마치고 1964년에 나는 군에 입대하게 되었다. 군 생활 동안 오리진 회화 운동만으로 새로운 가치관을 정립하는 것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이에 1967년 제대 후, 대학 한 해 위 선배들로 결성된 무동인, 한 해 아래 후배들로 결성된 신전동인과 오리진이 연합하여 북창동에 있는 중앙공보관에서 《청년작가연립전》을 개최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무동인은 현장성을 중심으로 한 작품을, 신전동인은 퍼포먼스를, 그리고 오리진은 기하학적 추상 회화를 선보이며 기존의 작품형식, 행동 양식, 사고 등 모든 것을 뒤바꾼 전시였다. 언론에서 “이것도 미술이냐”라 평가했을 정도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 윤: 4.19 혁명 이듬해에 일어난 5.16 군사 정변 이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진행되었고 민생고를 해결하자는 명목하에 나타났던 것이 근대화라 볼 수 있다. 급격히 진행된 도시화가 기하학적 추상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가.

    서: 1963년경에는 우리나라에 아파트가 없었다. 현대식 건물도 없었다. 나는 산업화가 진행되기 전에, 그와 무관하게 나의 내면에 응축된 세계에 영감을 받아 작품관을 발전시켰다고 항상 주장한다. 나의 기하학적 추상은 내가 자라온 환경, 과정, 그리고 어릴 적부터 형성된 나의 정신에 뿌리를 두고 있다. 나는 서울 사람이지만 한옥에 살았다. 기하학적인 완자 문양의 문창살, 창문에 발린 창호지, 집 안에 있는 고가구, 백자, 민화(책거리) 등을 매일 보면서 자랐다. '오리진'이라는 회화 운동을 통해 기존 질서에 도전하고자 했는데, 그 후 새로이 정립할 미술은 무엇인가를 군 생활 3년 동안 깊이 고민했다. 그때 가장 먼저 떠올랐던 것이 바로 내가 가족과 함께 살았던 환경, 그 안의 혼을 표현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도시적 미감과 이를 연결 지으려는 후대의 관점은 이해하나, 나는 그와 관계없이 오로지 내 환경 조건과 과거의 기억을 기하학적으로 발전시켰을 뿐이다.

    ⎯ 윤: 오리진이 시도했던 기하학적 추상이 근대화나 도시화의 형성 속에서 탄생하긴 했지만, 그보다는 어린 시절부터 한옥에 살면서 자연스럽게 접한 전통적인 소재, 즉 한지를 비롯하여 창호, 백자, 민화 등에서 작품의 주요 모티브를 얻었다는 말씀은 서 화백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 굉장히 중요한 대목이겠다. 삶의 과정에서, 축적된 경험 속에서 형성된 미적 감수성이다. 그러나 1967년을 전후로 여러 경로를 통해 서양의 미술이 본격적으로 한국에 유입되었다. 하드 엣지(Hard-edge Painting)를 위시한 서양의 기하 추상 등에서 영향을 받기도 했을 것 같은데.

    서: 외국 미술 사조와 나의 작업을 연관시키려는 경우가 간혹 있지만, 나는 단호하게 그것은 잘못된 해석이라고 본다. 1960년대는 전기도 제대로 안 들어오던 가난한 시기였다. 텔레비전은 당연히 없었고, 라디오, 전화기 등의 통신 기기도 오늘처럼 흔하게 사용되지 않았다. 외래문화와 소식이 빠르게, 자세하게 전해지는 시대가 아니었다. 일본이나 서양에서 진행되던 최신 미술은 더욱이 느리게 수용될 수밖에 없었다. 하드 엣지라는 것은 내가 기하학적 추상을 처음 발표하고 한참 후에 지인이 말해 주어서 알게 되었다. 미술은 창의적이고, 도전적이고, 전위적이어야 한다. 늘 새로워야 한다고 배웠다. 그리하여 앵포르멜에 대항한 새로운 시도로서 오리진의 기하학적 추상이 나왔고, 당시에는 ‘기존에 없던 전위적인 미술’로 평가받았던 것은 사실이다. 서양의 기하학적인 미술이 한국 미술계에서 일종의 유행처럼 번진 것은 그 이후였다.

    ⎯ 윤: 말씀대로 기하학적 형태가 완자창 무늬 등에서 영향 받은 것이라면, 또 하나서 화백의 작품을 이해하는 중요한 지점은 백자 등에서 유래한 유백색의 미학이 아니겠는가. 노란색, 청색 등 파스텔 톤의 중간색 바탕이 잔잔한 변주를 일으키지만 ‘백(白)’이라는 미감은 현재까지도 서 화백의 작품세계를 지배한다.

    서: 좋은 말씀. 백색과 관련하여 두 가지를 이야기하고 싶다. 하나는 대학 시절 은사들을 통한 배움이다. 3학년 담임 이규상 선생, 4학년 담임 김환기 선생 등 일본에서 최고의 전위 미술, 새로운 추상 미술을 배우고 온 분들에게 실기를 배웠다. 그리고 최순우 선생, 이경성 선생, 조요한 선생, 맹인재 선생 등이 강단에 계시어 미술사 및 미학을 가르쳐 주었다. 특히 최순우, 맹인재 선생의 백자, 청자에 대한 강의 및 현장을 통해 배운 우리 전통 미술의 역사적 가치, 정신은 아직도 기억한다. 소위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배움이었다. 다른 하나는 내 어린 시절의 기억이다. 어릴 때 나의 할머니와 어머니가 창틀에 창호지를 깨끗이 발라 놓았는데, 나는 철없는 마음에 거기에 구멍을 뚫곤 했다. 그러면 나를 야단치고는 이내 한지 한두 장을 덧붙이며 구멍을 막으셨다. 나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바로 이 창호지 색의 맛이다. 내가 방에서 달빛이 들어오는 것을 바라보고 있으면, 창호지 한 장의 맛과 두 장의 맛과 세 장의 맛이 달랐다. 은은한, 독특한 맛이 있었다. 또 우리 어머니는, 물론 우리 시대 모든 여성이 그렇게 했지만, 개울가에서 빨래를 하고는 빨랫감을 그대로 집으로 가져와 다듬이질을 하셨다. 당시는 염색 천 등이 없었으니 빨랫감은 대개 흰 면직물이었는데, 왜 빨기만 하여도 충분히 하얀 것을 다듬이 방망이로 두드리며 더 희게 만드는가. 거르고 걸러진 것. 이것이 바로 흰색이다, 그리고 이것이 일종의 정신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그림에 있어서 ‘거른다’는 행위 혹은 표현은 굉장히 중요하다. 나는 색을 ‘거르고자’ 하며, ‘걸러진’ 정신을 지향한다. 된장이 끓는 냄새, 고추장이 익어가는 냄새, 다듬이질의 방망이 소리, 마당에 핀 채송화, 봉선화, 이 모두가 내가 물려받은 것이며 그 다양한 색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이는 내가 표현하고 싶은 색이고 그 색을 걸러내 보고 싶은 것이다.

    나는 판화를 하면서도 색을 ‘걸러냈다.’ 당시에는 대개 물감을 그대로 판에 칠해 바로 찍었는데, 나는 물감을 신문지, 창호지 등에 걸러내어 기름을 빼낸 후, 그것을 다시 뭉개고 롤에 묻혀 판화를 찍었다. 물감을 그냥 가져다 바르는 것이 아니고 색을 걸러내어 다시 만들었다. ‘거른다’는 내 모든 양식의 표현의 정신의 근저를 이룬다.

    ⎯ 윤: ‘하나의 자기화를 시킨다.’ 단색화를 다룰 때 내가 쓰는 표현이기도 한데, ‘발효’의 과정을 거치는 것 같다. 가령 엿이나 뼈 국물을 고듯이, 시간을 들여서 계속 우려내고 다려내는 과정 말이다. 시중의 제품에서 나온 것이 아닌, 내 마음에 드는 색 혹은 상태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찾아내는 과정을 중시한다는 것.

    서: 맞다. 창호지 이야기가 나온 김에 나의 색에 대해 부연하자면, 서양 주택에서는 햇빛이 유리창을 곧바로 통과하여 들어온다. 말 그대로 직사광선을 받아들이게 된다. 반면 한옥의 창에는 한지가 발라져 있어 햇빛은 이를 한 번 걸러서 들어온다. 이것이 나의 색이라고 생각한다. 창호지가 햇빛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이 흡수된 빛을 은근히 발하는 것과 같이, 내면에 무언가가 숨겨진 것이다.

    ⎯ 윤: 그래서 그런 방법론이 색에도 반영된 것으로 생각된다.

    서: 그렇다. 언뜻 보았을 때는 나의 작품이 와닿지 않을 것이다. 가만히 들여다봐야 저 속에서 내 이야기가 드러난다. 거기에는 나의 역사, 전통, 생각, 지금까지 말한 것들이 전부 숨겨져 있다. 오늘도 여전히 고민하는 것들이다.

    ⎯ 윤: ‘동시성’이라는 제목 속의 항구성이다. 한 가지 제목을 육십 년 동안 고수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서: 1970년에 첫 개인전을 서울 신문회관에서 열었다. 출품작들은 모두 흰색이었다. 흰색을 통해 백의민족의 정신, 백자와 창호지의 미감을 표현하고 싶었다. 당시의 작품들을 아직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시간이 경과하면서 묻은 작품 표면의 때를 클리닝할 수 없어 이후로 전시하지 못하고 있다. 더구나 당시 인쇄 기술로는 작품 이미지를 제대로 인쇄하지 못하여 남아있는 자료조차 없는 것이 나에게는 큰 타격이다. 그 중 1969년 제6회 파리 비엔날레에서 호평을 받았던 <동시성 69-H>, <동시성 69-I>를 나는 백색 작품의 시초라고 이야기한다.

    ⎯ 윤: 흰색 작품에 때가 묻어서 전시를 못하고 있다 하였는데, 작품에 묻은 세월의 흔적을 없애려고 하지 말기를 바란다. 모든 것은 다 변한다. 물질도, 사람도, 성격도, 자연도 변함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 그것 또한 예술적으로 가치 있게 느껴진다.

    서: 전적으로 동의한다. 모나리자 그림이 갈라져 있는데도 사람들은 그것을 여전히 아름답다고 여기듯이, 변함 자체를 보면 모두가 역사다.

    ⎯ 윤: 그리고 한(恨)의 문제에 대해 더 듣고 싶다. 한은 서양에는 없는 정서이자, 억압의 기제가 누적된 어떤 마음의 상태인데, 그 한을 작품에서 어떻게 표상했는가.

    서: 이중섭 선생은 소를 통해, 김환기 선생은 달 항아리를 통해 우리의 정신을 표현했고, 또 박수근 선생은 우리 여인들의 모습을 통해 그네들의 아픔과 생활을 표현했다. 이 모든 것이 한과 연결되어 있다. 선생들의 작품을 보면 고통이 있고, 민족사가 있다. 내가 그분들과 다른 것이 무엇인가를 고민하였을 때 나의 생활 속에서 답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한이라는 것은 서러움. 슬픔이기 이전에 우리 고유의 역사 속에서 형성된 상징성, 정신성이다. 나는 그것이 한지로 표상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내가 가장 아끼는 작품이자, 한을 가장 농도 깊게 표현한 작품이 1971년 《AG》 전에 출품한 <동시성> 연작이다. 도관은 한지를 여러 장 겹쳐 열 네 개 패널의 오브제 시리즈를 제작했는데, 일부러 한지의 가운데만 붙이고 가장자리는 자연스럽게 바깥으로 툭 떨어지도록 했다. 한은 바로 저렇게 나온다고 생각했다.

    ⎯ 윤: 그럼 한이라는 것은 결국 한국의 고유한 미의 결정이 아닌가. 서 화백의 기하학적 추상 또는 단색의 미학을 압축해보면, 서 화백의 혼과 정신이 한에 대한 우리 고유의 미의식으로 수렴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서 화백 회화에 내재한 색은 색상 자체보다. 색이 걸러진 상태에서 그와 함께 표백된 담백한 우리의 정신이다.

    색을 거르는 반복적인 작업을 육십 년간 끊임없이 지속하고 있다. 단색화 작가들은 흔히 오랜 세월 보면 변화가 없다. 매너리즘에 빠졌다. 이런 식의 피상적인 비판을 받기도 한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서: 사실 나는 작품의 변화기를 많이 가졌다. 하나의 지속적인 정신, 일관된 작품 세계는 있되, 작품의 양식 변화는 꽤 많았다. 초기에는 원색적이고 기하학적인 추상 작업을 했고, 1980년대까지 우리의 정신을 드러내는 중성색을 바탕으로 기하학적 작품 세계를 이어 나갔다. 1990년대부터 형과 색이 자유로워지면서 변화된 구조 속에 나 자신을 이입시키는 감성적인 회화 작업을 하기 시작하여, 2000년대 이후 해체기를 가졌다. 형을 완전히 소멸시켜 더 자유로워진 감성, 나 자신의 회복을 위한 명상적 세계, 미의 회복을 통한 새로운 정신성을 표현했다. 변화는 지금도 추구하고 있다. 다만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앞서 이야기한 나의 미학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 윤: 몇 십 년 동안 형과 색이 끊임없이 변주했다고 할 수 있겠다. 형과 색의 관계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서: 초기에는 형과 색의 개별성에 착안하여, '동시성'이라는 명제로 각기 유리된 것의 화합을 추구했다. 공(空)과 색과 면을 한 화면에 모으는 것, 가시적인 세계와 비가시적인 세계를 동시에 가시화하는 것 말이다. 그러나 해체기에 접어들어서는 평면이면서 평면이 아닌 것, 공간이면서 공간이 아닌 것, 반대로 이야기하자면, 공간이면서도 평면이고 평면이면서도 공간이 되는 화면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되었다. 요새는 이를 더 발전시켜 어떻게 하면 공과 면 모두가 내면으로 숨어들 수 있을지를 연구하고 있다. 형도 부수고 면도 없애면서 모든 것이 색 속에 숨어 들어가고 있다.

    ⎯ 윤: 겨우내 얼었던 강물이나 냇물은 봄이 오면 그 얼음이 깨지면서 결국 녹아 물이 된다. 현재까지 서 화백의 작업에서 형과 색의 상관은 이러한 변화를 가졌던 것이 아닐까. 즉, 형과 색이 분명하던 얼음과 같은 상태가 끊임없이 파편화 되는 과정을 거쳐 이제는 비로소 모든 것이 완전히 구분되지 않는 물이라는 상태에 도달한 것이다. 하지만 다시 겨울이 오고 봄이 와 물이 얼고 녹는 과정이 반복되듯이, 서 화백의 작업에서도 그 현상이 되풀이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형이 다시 작품에 올라올 수 있는 가능성 말이다. 이때의 형은 1960년대에 처음 시작했던 형과 다를 것이다. 똑같아 보이는 사각형일지라도 개념적으로 다른 사각형일 것이다. 앞으로 얼음이 다시 나타날 수 있을 것 같은가, 아니면 물의 상태로 더 파고들 것 같은가.

    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매일 작업에만 몰두하고 있다. 요즘은 산사에서 들리는 풍경 소리, 바람소리, 물소리, 깊은 산속의 새소리, 자연의 각가지 소리 등을 어떻게 작품화 할 수 있을지 생각하며 작업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자연 속에서 우리 스스로가 빠져들어가는 상태에 집중한다. 우리가 생을 마감할 때도 그런 식으로 자연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죽음 이후 흙으로 되돌아가는 길이 무엇인가를 염두에 두면서, 그저 무념, 침묵의 상태를 지향하고 있다.

    ⎯ 윤: 자연에의 귀의다. 누구보다도 회화 자체의 엄격성을 지켜 온 서 화백이 일련의 과도기를 거쳐 해체의 국면을 맞이하고, 이제 그 해체마저 극복하여 자연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이다. 소리를 내면화하여 그것을 색으로 바꾸는 문제는 거의 신비에 가깝다고 본다. 누에는 뽕잎을 먹고 실이라는 전혀 다른 물질을 만들어 내는데, 이는 화학적 변화의 결과이기 이전에 누에의 정신이 응축된 것이다. 소리를 색으로 전환하는 작업은 누에가 통일을 먹고 실을 만들어 내는 과정과 비견된다. 굉장한 발상이라고 생각한다.

     서: 나의 직설적인 표현을 정리해주시어 감사하다.

    ⎯ 윤: 단색화 미술은 ‘단색화(Danseakhwa)’라는 용어가 생기기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우리 고유의 생각과 미감을 ‘단색화’라 새롭게 명명할 때와, 그것이 타자의 시선에서 ‘모노크롬’으로 단순하게 분류될 때는 명백히 다른 해석을 가지게 된다. ‘단색화’ 미학의 정립을 통해 국내를 넘어 국외에서도 한국미술의 독자성이 더 수월하게 인정받게 되었다. 그 결과, 단색화는 오늘날에도 계속하여 세계적으로 세를 확장하고 있다. 다수의 단색화 원로 작가 작품이 세계 주요 미술관에 소장되고 있는 현 상황은 한국현대미술사에서의 ‘단색화’ 등장 이후 큰 변화 중 하나라 볼 수 있다.

    서: 2000년 광주비엔날레에서 윤 선생이 ‘단색화’ 개념을 처음 발표했고,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단색화 미술에 대한 첫 전시가 열렸다. 그전까지만 해도 ‘단색조’냐 ‘모노크롬’이냐 하는 논쟁이 심했다. 1975년 일본 도쿄화랑의 《한국 5인의 작가, 다섯 가지의 흰색》전 당시만 해도 ‘모노크롬’이라는 범주에서 우리의 미술이 평가되었다. ‘단색화’라는 용어가 생겨나기 전까지는 이 미술 사조의 개념을 총체적으로 정립하기 참 어려웠다. 그러나 한국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미술이 세계화될 수 있는 하나의 계기를 윤선생이 만들어 주었다고 생각한다. 덕분에 지금은 우리 고유의 현대미술이 외래 미술에서 파생되었다는 혹자들의 단편적인 해석이 없어졌다.

    ⎯ 윤: 육십 년에 가까운 화업이다. 앞으로 더 하고 싶은 일이나 나아갈 방향은 무엇인가.

    서: 말씀드린 것처럼 무념, 침묵 속에서 덤덤하게 작업에 정진할 것이다.

    윤진섭 진행, 권영진 편집

  • ✦ 전영백 엮음, 『22명의 예술가, 시대와 소통하다』, 궁리(2009) 수록

    ⎯ 선생님의 초창기 대표적 활동으로 1960년대 '오리진' 과 'AG' 가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 같은 그룹활동에 참여하게 된 계기와 활동하신 내용 그리고 해체에 이르게 된 과정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1963년에 홍익대 출신 9명으로 오리진이 출발했습니다. 그 당시는 국전의 틀이 완고해서 현대작가가 들어갈 틈이 없었고 그러다 보니 작품발표도 혼자보다는 같이해서 우리 소리를 높이자는 분위기였지요. 또 그래야 더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습니다. 기성세대에 도전하고 우리세대에 새로운 미술을 구현한다는 취지로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4.19세대라고 할 수 있는데, 1960년 4.19혁명은 당시 정치 뿐 아니라 문화·예술에서도 혁명이었습니다. 그러한 기운이 기성세대의 억눌림으로부터 새로운 문화창달을 꾀하자는 취지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지요. 그러다가 진정한 현대미술운동을 하려면 홍익대를 벗어나 대한민국 전체 차원의 규하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오리진의 작가 일부가 연립전을 추진하고, 서울대와 지방을 막론하여 오광수, 이일, 김인환 선생 같은 미술평론가들까지 규합해서 AG를 결성하게 됩니다. 대한민국에 현대미술을 뿌리 내린다는 기조 아래 전국 각지에서 새로운 미술을 시도했어요. 그리고 말로만 활동하는 게 아니라 문헌으로 남기기 위해 한국 최초의 미술지인 『AG』도 발간했지요. 그 당시 출판검열이 워낙 심해서 동인지라고 하여 비매품으로 만들어 초지에 하나하나 글씨를 써서 제작해서 나눠 갖곤 했지요. 그렇게 4~5년 하다가 각자의 길로 가게 되었습니다. 단체란 것이 그렇지요. 목적이 달성되면 더이상 운동을 할 필요가 없지 않나 하면서 해체되고, 또 오래 되면 원래 취지를 살리기도 쉽지 않고. 결국 뿔뿔이 헤어지긴 했지만 그 당시 우리는 절실했습니다.

    ⎯ 당시 화단의 분위기는 어떠했는지요? 선생님은 당시 화단과는 다른 경향의 작품을 추구하셨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당시 선생님의 작품에 대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내 대학시절 때는 사실주의 작품이 절대적이었고 현대미술로는 앵포르멜 추상작품들이 왕성했는데, 우리는 왜 이것을 해야 하는지 회의에 젖어 있었어요. 그래서 다들 껌껌하고 시뻘건 어두운 그림을 그릴 때 나는 밝게 그렸고, 사람들이 형태 없는 그림만 그릴 때 나는 기하학적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 당시 신문에서 내 그림을 “자로 그리는 그림, 기하학적 그림, 노란 그림”으로 설명하면서 “젊은 놈이 미쳤구나” 하는 반응이었지요. 왜냐하면 그 당시 미술에 대한 인식은 그냥 예쁜 그림, 장미꽃이나 온실의 선인장 같은 그림을 그리면 된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러나 시대를 이끌어가는 게 예술가의 사명 아닙니까? 어떻게 새로운 미술을 만들어갈 것인가에 대해 고민을 거듭했지요. 그러면서 1967년에 《청년작가연립전》을 열게 됩니다. 내가 속했던, 기하학적 추상 타블로를 추구한 오리진, 오브제 미술을 추구한 무동인, 해프닝을 했던 신전동인의 연합이었습니다. 국전이 워낙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어서 우리 스스로 현대미술을 자리잡아가려고 노력했지요.

    ⎯ 선생님은 40년 넘게 ‘동시성’이리는 제목으로 기하학적 추상작품을 꾸준히 해오셨습니다. 이처럼 ‘동시성’이란 제목을 사용하게 된 계기와 지금까지 고집하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작가는 대개 두 스타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새로운 미술을 하면서 시대마다 변화해가는 작가가있는가 하면, 하나의 세계를 지구적으로 평생 추구해가는 작가가 있습니다. 나는 후자 쪽으로 ‘동시성’이라는 제목으로 1960년대에 처음 작품활동을 시작하였고 지금까지 한평생을 바쳐 내 세계를 추구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종교와 같은 신앙심이랄까요.

    ‘동시성’을 명제로 삼은 출발은 1963년부터였습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마음처럼 내 작품에 어떤 이름을 지어줄지 고심했었지요. 동시성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것으로, 피안(彼岸)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것이 나를 통해서 동시에 발현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줍니다. 그것을 조형적으로 구현시키기 위해 색과 면과 형이 동시에 화면상에서 어울릴 수 있는 것이 무엇인 지를 과제로 삼아왔지요.

    ⎯ 선생님이 오랜 기간 작품에서 보여주신 기하학적 형태와 독특한 색상들의 영감의 원천은 무엇인지요?

    나는 서울 사람이지만 한옥에서 자랐어요. 그러다 보니 어려서부터 자연스레 창호지 문, 기하학적 문양 창살에 익숙해졌지요. 기하학적 사각형도 완자 문양의 문창살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할 수 있지요. 달빛이 드리운 창호지 문이나 집안 곳곳에 놓여 있던 도자기를 보면서 색감에 대해 영감을 받았고 다락방 문풍지에 해마다 바꿔 걸어주던 민화를 보고 수없이 따라 그리면서 놀았습니다. 완자 문양이 뭔지 알아요? 아파트에서 태어난 세대들은 절대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그리고 대학 때 좋은 동양미술사 선생님을 만나서 공부를 많이 할 수 있었고 조선 백자에 관해 더 연구하게 되었어요. 항상 우리 얼, 우리 정신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 선생님의 1960년대 작품은 1970년대 이후 작품들과 달리 원색이 두드러집니다. 또한 70~80년대 작품이 차갑고 이지적인 기하학적 추상이라면, 1990년대 이후 작품은 따뜻한 감성이 느껴집니다. 이처럼 시대별 작품경향이 변화하게 된 원인은 무엇인지요?

    1960년대 작품은 앵포르멜 미술을 탈피하기 위해 밝은 색채에 주목하였습니다. 이후에 기하학적이면서 전통성을 잘 드러낼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하다가 한국의 대표색인 오방색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모색기를 거쳐 점차 정체성을 찾아가면서 흰색에 대한 문제에 관심이 커졌습니다. 어려서부터 봐 왔던 백자의 색, 창호지의 색에서 영감을 얻어 내 자신을 환원시키는 일에 골몰하게 된 것입니다. 나는 귀의했다고 표현하곤 합니다만.

    1960년대 중반 기하하적 평면작업이 후반으로 갈수록 입체적으로 약간 변하고 1970년대에 와서 자기환원과정을 거치면서 나를 거르고 색을 거르다 보니 절제된 색, 즉 중간색으로 귀결되었습니다. 환원되는 조형성과 공간구성에 주목하게 되었고요. 1970~80년대를 절제와 환원이라고 표현한다면, 1990년대부터는 확산의 세계로 넘어갔다고 보면 됩니다. 공간, 사고, 정신의 확산이지요. 내 모든 감성과 이성을 절제하다가 시대가 흘러감에 따라 확산되면서 기하학적인 것을 더 폭넓게, 형태도 크고 생각도 자유롭게 변해왔습니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것들이 통합된 감성의 세계—절제의 감성, 자기회복의 감성, 자유의 감성—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삶의 변천이랄까요. 예전엔 차고 날카롭단 소리도 많이 듣고 그래서인지 청색도 즐겨 쓰곤 했는데 나이가 드니 점점 욕심을 버리게 되고 요즘엔 어디서 태어나서 어디로 갈 것인가를 많이 생각합니다. 예술은 작가의 정신이고 삶이니까 그게 작품에 그대로 투영되고 반영되는 것이지요.

    ⎯ 현재까지 1970년대의 단색조 회화에 대한 용어정리가 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단색회화’ ‘모노크롬’ ‘한국적 모노크롬’ ‘단색조 미술’ 등 다양한 용어가 쓰이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단색조 회화의 대표작가로서 선생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용어에 대해 먼저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모노크롬’이란 용어는 외국에서 들어온 말이지 우리말이 아닙니다. 우리 미술을 표현하기에 모노크롬이란 용어는 적절하지 않다고 할 수 있지요. 일본에서 말하는 ‘모노하’ 또한 적당한 용어가 아닙니다. 한국에서는 일컬어 ‘단색조 미술’ 이라고 하는데 이 또한 적절하다기 보다는 근사치입니다. 자생적으로 발생된 우리 단색조 회화를 지칭할 우리만의 용어를 정립해야 합니다. 이러한 용어와 관련해서 여러 작가와 이론가가 고민하고 있지요.

    ⎯ 1970년대 한국 단색조 회화에 대해 한국미의 독자적 정체성이란 의견과 서구의 아류나 일본 모노하와의 관계 속에서의 무조건적 수용이리는 의견 등 상이한 시각이 존재합니다. 한국 단색조 회화의 정체성과 관련한 선생님 의견이 궁금합니다.

    1970년대 단색조 회화는 서구의 아류이거나 일본 모노하의 영향 속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생적인 것입니다. 오광수 선생의 말대로 서양에서 시작된 단색조 회화가 물질과 안료를 바탕으로 이뤄진 하나의 단색이라면 우리 단색조 회화는 어떠한 색이든지 색상 자체보다 색이 걸러진 상태, 즉 표백된 색에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만이 뽑아낼 수 있는 담백한 정신이 담긴 색이라 볼 수 있는데, 이는 비물질주의를 표방하는 것으로 정신적인 지향과 관계가 있습니다. 금욕적인 작업방법을 통해 우리 고유의 ‘한(恨)의 미의식’을 느낄 수 있게 합니다.

    일본 모노하의 영향을 받았다는 말은 어불성설입니다. 1970년 내 첫 개인전에 일본 평론가 도노 요시아키(東野芳明)가 방문해서 무슨 생각으로 그린 것이냐고 질문을 하더군요. 그래서 우리 백자에 대한 의미, 흰색의 의미, 창호지의 의미, 백의민족의 의미를 설명해주었더니 큰 감동을 받은 인상이었습니다. 이후 1972년에 도쿄 무라마스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자 일본인들이 내 작품만이 갖고 있는 독특한 색에 매료되었습니다. 그 이듬해 도쿄화랑 야마모토 다카시(山本孝) 대표가 한국의 내 작업실을 직접 찾아와서 흰색 그림이 독특하다며 유사점이 있는 젊은 작가를 찾아 기획한 전시가 《한국 5인의 작가: 다섯 가지 흰색》(1975) 입니다.

    나는 그 당시 젊은 작가들에게 내 논리를 많이 설명했지요. 야마모토 대표의 기획에 더불어, 이론적 체계를 잡아준 미술평론가 나카하라 유스케(中原佑介)도 인정하듯이 그때 일본에는 그런 작품이 없었어요. 그리고 ‘흰색 전(展)’이라는 표현을 봐도 알 수 있듯이 당시엔 모노라는 용어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후에 모노라는 용어가 생겨났으니 모노하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억측입니다. 우리는 자발적으로 개개인이 미술을 한 것이고 후에 그런 작가들을 모아서 단색조 회화로 분류했을 뿐이죠.

    ⎯ 1970년대 단색조 회화는 유행처럼 범람하다가 시들해졌다고도 볼 수 있을 듯합니다. 하지만 선생님의 경우 시대에 따라 약간의 변화는 있었지만 지금까지 기하학적 추상미술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 있다면 알고 싶습니다. 1970년대 이후 외부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없으셨는지요?

    예술은 인정받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꽃 그림이나 사과 그림이 잘 팔린다고 모두 같은 것을 그리는 태도는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미술은 유행이 아니에요. 내 생각대로 그렸지, 팔겠다고 그려본 적은 없습니다. 실제로 오십이 넘도록 작품을 팔아본 적이 없었습니다. 우리 때에도 유행을 좇아 이거 그리다 저거 그리다 하는 소위 변절작가가 많았지만 그런 식으로는 오래 가지 못합니다. 비단 예술뿐만 아니라 사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그런 삶은 삶의 진정성을 모르지요. 미술이란 내 사명감으로 시작해서 끝나는 것입니다. 2007년 11월에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추상미술 경계의 유희》라는 제목으로 전시를 한 적이 있어요. 우리 화단이 너무 꽃 그림으로 만연하니까 우리에게 이런 미술도 있다는 걸 알리는 취지에서 시작한 전시였어요. 이렇게 외롭더라도 사명감을 지키며 외길을 가는 것이 순수미술의 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 최근 한국의 단색조 회화에 주목한 『자연의 색: 한국의 모노크롬 아트』의 출간소식을 접했습니다.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 특히 예술과 문화에 관심이 높은 엘리트층 고정 고객을 갖고 있다는 아술린 출판사에서 출간하여 더욱 화제가 되었는데요.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그 책과 관련한 전시들을 기획한 이가 조순천이라고 뉴욕에서 활동하는 독립 큐레이터지요. 미국 아술린 출판사의 아시아 쪽 브랜드 파트너로 알고 있습니다. 학교 때 내 제자이기도 하고요. 한국 단색조 회화 작가들을 해외에 알리고 싶다고 해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작년 11월에 노화랑에서 출판기념회로 《한국 현대미술 대표 작가 9인전 (김창열, 박서보, 하종현, 정창섭, 최명영, 서승원, 이강소, 이승조, 김태호)》(2008.11.6~11.25)을 했고 올해는 상하이의 웰사이드갤러리에서 전시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뉴욕에서도 전시를 추진할 예정이라고 들었습니다.

    ⎯ 끝으로 현재 작업하는 후배 작가들 혹은 미술계에 종사하는 후배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우리나라 미술계의 안타까운 현실은 너무 한쪽으로 편중되어 있다는 점 입니다. 외국의 경우, 화랑들도 모두 각자의 전문성이 있어요. 단색조 회화만 다룬다든지, 중국미술만 다룬다든지, 상업화랑은 상업작품만 취급하는 식으로 기능이 나뉘는 전문화랑들이 많이 존재합니다. 반면 우리는 정부도 젊은 작가만 지원하고 화랑도 젊은 작가만 상대해요. 현재 유행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고루하게 생각하지 말고 오히려 존중해줄 때 다양성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양성이 예술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후배님들께는 유행만 좇지 말고,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에 너무 연연하지 말고 자기 정체성을 찾으라고 조언하고 싶어요. 아트페어나 옥션에만 작품을 내놓지 말고 아방가르드 정신을 추구하면 좋겠습니다.

    김지예·심지언 진행

  • ✦ 『미술세계』 제266호(2007) 수록

    ⎯ 조광석(이하 조): 작가 자신에게 오리진 활동은 어떤 의미를 지니나?

    서승원(이하 서): 1962년 홍익대 회화과 학생들 중 뜻있고 진취적인 동기들 몇 명이 모여서 이듬해 가을에 그 활동을 세상에 드러내고 발표한 것이 오리진이다. 과거적이고 답습화 된 우리나라 미술 풍토에서 새로운 현대적 경향의 미술을 시작해 보자는 취지를 갖고 시작한 우리가 당시 내걸었던 캐치프레이즈는 “기존 세대에 도전하고 새로운 미술을 창작한다”였다.

    상황적으로 50년대에서 60년대 초까지의 우리나라 미술은 앵포르멜 미술사조와도 같은 액션페인팅 미술이 만연해 있었고, 추상으로써 미술 감각을 보이는 것이 전반적인 미술성향이었다. 60년대 들어 일어난 4.19 혁명은 그 때의 문화, 미술, 사고, 정치 등을 한바탕 뒤집는 계기가 되었다. 고질적인 기존의 과거 답습적인 성향에서의 탈피, 억압에서 벗어나는 자유에의 의지들과 더불어 회복적 정신을 지니고자 했던 것들이 오리진 멤버들의 뜻이었다. 그렇게 우리가 뜻을 품고서 서울시내 전시장에 학생작품들을 들고 나가 첫 작품을 발표한 것은 우리의 포부를 일궈 나가는 시발점이 된 셈이다. 오리진은 현대미술 최초의 그 운동이었으며 현대미술사에 있어 중요한 계기가 된 움직임이다. 당시의 우리들은 일주일에 한 번 꼴로 모여 스터디를 했다. 그림의 이론적인 것을 구축하기 위해, 또 이를 구속화시키고 무장화시키는 것에까지 여러모로 영향을 끼친 당시에는 혁명적이지만 소박했던 학술모임을 유지했던 것이다.

    ⎯ 조: 오리진의 활동을 《청년작가연립전》을 빼고 말할 수는 없다. 당시에 일었던 사회적 파장은 어떤 의미가 있나?

    서: 그것은 오리진 멤버 아홉 명이 당시 미술계에 만연한 평면적, 기하학적 추상이 아닌 새로운 부흥을 일궈보자는 생각을 붓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실행한 것이다. 실험성에 대한 도전과 효과를 극대화시키고자 했던 적극적인 움직임은 당시로서는 충격이었다. 그림을 그리는 젊은 청년들이 피켓을 들고 데모를 하며 “우리 그림을 봐 달라”고 외친 것은 당대에 큰 센세이션을 일으켰으며 “이것이 미술인가?”하는 오래 기다렸던 물음을 우리 사회의 수면 위로 떠올렸다. 기존의 그늘이 드리워 있고 어딘지 모르게 한스러운 이미지의 예술이 미술이라는 인습에서 벗어나던 시도는 그림 자체에서도 나타난다. 흰색을 많이 써 전체적으로 밝은 색감을 내고, 테이프와 자를 이용하는 등 물성적인 오브제가 부각된 것이다. 당시 우리들의 용감한 시도는 ‘회복적 그림’에의 지점으로 압축되어진다.

    ⎯ 조: AG의 활동을 미술사적인 의미에서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까? 

    서: 아방가르드에서 AG로 넘어간 흐름은 미술계에 있어서 크나큰 역사적 산물이요 미술시장 활성화이다. 기존에는 알게 모르게 홍대 출신 작가들끼리 만의 활동이 많아 현대미술과 미술정신의 발전에 있어 아쉬운 점이 있었다. 그래서 전국의 미대출신, 그리고 꼭 미대출신이 아니더라도 능력 있는 작가들이 모여보자는 뜻을 모으게 되었다. 그래서 전체적인 종합미술 안에서 작가들을 모으고, 이론적인 무장을 위해 당대의 김인환, 오광수, 이일 등의 평론가들을 찾아다녔다. 그 결과 AG 미술운동에 있어서 「현대미술의 진위는 무엇인가?」와 같은 글이 발표되었고, 결과물이 단지 운동에서 그치지 않고 책으로 남겨지게 되었다. 미술지, 외서도 없었던 당대에 처음으로 외국의 현대미술까지도 소개를 해 6.25 전쟁 이후, 국정을 중심으로 한 시민주의 탓에 우물 안 개구리 격이었던 국내 미술에 반가운 소식을 전해주었다.

    ⎯ 조: 작품을 보면 시대가 보인다. 또 작품은 모두 평면회화이다. 특별한 이유와 시대적 영향이 있나?

    서: 변화의 흐름을 타고 당시 화가들은 자신의 화법에 변화를 주어 트렌드와 미래지향적인 어떠한 예견을 쫓기도 하였다. 하지만 나는 그때에도 계속 평면을 고수하였다. 나는 내 작업 스타일의 맥을 놓아 작가적 정신을 잃고 싶지 않았다. 내가 처음으로 발표했던 '한지 작업'의 경우는 전통적 소재를 통해 평면을 탈피하고, 그러면서도 미래지향적이기까지 할 수 있는 고민을 작업으로 풀어낸 것이다. 나의 내부적인 고민과 그로 인한 변화는 색과 형태로써 드러난다. 단청과 한복에서 오는 ‘우리의 색’을 살려내려 60년대 중반까지 원색을 주로 썼던 작업에서 60년대 말에 들어서자 도자에서 오는 백색에 관심을 갖게 됐다. 내게 있어 백색은 순결함이면서 덩어리 속에서 덩어리가 아닌 것, 충만한 와중에 비어 있는 것과도 같은 모순적인 화합을 뜻한다.

    또 나는 우리 ‘민화’에도 주목했다. 책걸이 그림에서 오는 조형성. 그 안의 원근법의 무시와 평면성의 뒤집기 같은 무질서를 보고 강한 자극을 받았다. 그 때부터는 이전의 색채와 더불어 형태에 대한 고민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자 자연히 ‘환원’으로 연결되었다. 환원할 수 있는 색, 환원되어질 수 있는 형태로 걸러짐의 미학은 간략한 색채와 형태로 연결되었다. 여백 속에서 공간과 어우러질 수 있는 형태는 정사각형의 변형인 기하학적 사각형으로 도출되었다. 동시의 화면에서 구축되어질 수 있는 색, 선, 형태가 네모로 환원되어 나온 것이다. 난 그렇게 생각한다. 동시대성이라는 것은 공간의 절대 지혜이며, 그것은 곧 자신에게 가장 큰 언어법이라고 말이다. 내게는 평면 속에 모든 것이 존재할 수 있고, 존재하는 것이 평면 속에 담길 수가 있다.

    조광석 진행, 유다연 편집

  • ✦ 오상길 엮음, 『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 II Vol.2』, 도서출판 ICAS(2001) 수록

    ⎯ 오상길(이하 오): 오늘 인터뷰에 시간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중략) 청년작가연립전의 기획 배경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서승원(이하 서): 연립전보다 앞선 63년에 오리진 동인이 만들어졌어요. 아홉 명이 창립 멤버였고 64년도에 제2회전을 당시 우리나라 하나밖에 없었던 화랑인 중앙공보관에서 대대적으로 열었지요. 그것이 새로운 미술운동을 일으킨 시발점이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오리진은 과거 지향적이지 않은 새로운 작품성을 추구했는데, “과거의 미술이 아닌 새로운 미술을 창출하고, 새로운 미술에 도전한다.” 라고 내세웠어요. 즉 당시 앵포르멜이라든가, 벽동인전이라든가 하는 것과 다른 미술을 했다는 거지요. 대학 다닐 때 4.19가 있었으니까 그 당시의 시대적 흐름 자체가 어떤 의미로는 젊은 사람들이 자기의 회복을 외치던 때였거든요. 타성적이지 않다는 거죠. 미술도 그런 것이 되야 한다는 것이지요. 64년 졸업 후 군에 입대해서 그룹 운동을 좀 쉬게 되었죠. 제대 후 후배들인 신전이라든가 무동인라든가 하는 분들이 그 사이 해프닝과 오브제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미술운동을 하고 있었죠. 현대미술 운동을 하기 위해서 젊은이들만이 갖고 있는 여러 사람의 소리가 중요치 않느냐, 그때는 파워풀한 것이 필요하고 그 파워를 기반으로 해서 해야 하지 않나 했어요. 세 그룹의 대표들이 모여 청년작가연립전을 하자고 해서 덕수궁 옆자리에 옮겨 있던 중앙공보관 전관을 빌려서 전시회를 한 거죠. (…)

    ⎯ 오: [현대미술에 대한] 의식은 어떤 경로로 어떻게 이해를 하셨어요? 학교 수업이라든가 동년배 간의 토론, 논의가 있었을 것 같은데…

    서: 우리는 비교적 대학 들어가면서 토론할 수 있는 써클을 많이 가졌어요. 5.16이 되면서 홍익대학교는 미술대 하나만 남았거든요. 거기서도 순수 미술 쪽의 자칭 일등 하는 친구들이 모여 저녁이면 미술에 관한 토론을 많이 했어요. 과연 이것이 오늘의 미술이냐, 내일에 지향할 것은 무엇이냐 하는 것을 가지고 도출될 때까지 밤늦게까지 고민했고, 그 나름의 철학이 있었어요. 어린 나이였지만 많은 논의가 있었고, 자생적인 생각을 많이 이끌어냈어요. 술 마시러 다닌다던가 그런 건 모르고, 그림만 그렸으니까… (…)

    ⎯ 오: AG는 이전 세대와 다르게 상당히 학구적인 세대였던 것 같습니다. 현대미술에 있어서의 이론의 중요성을 절감하셨던 것 같은데 결성 배경과 활동은 어땠습니까?

    서: AG는 청년작가연립전 이후에 생겨진 건데, 그때만 해도 행동적인 미술 운동만 했지 미술사적으로 봐서 그림을 중심으로 한 행동이라 해야 할까, 행위랄까... 그것을 논리화시키고, 체계화시켜서 새로운 아이덴티티를 정립한 예는 없었어요. 그것이 필요하지 않겠느냐. 외국의 바우하우스 운동을 봐도 많은 작가 속에는 평론가가 있었고, 미술사적으로 본다면 인상주의라든가 그 뒤에는 평론가들이 다 있어서 미술운동을 통한 자기확립, 이론적인 근거의 백그라운드가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을 절감했어요. 또 하나 그 당시에는 책이 없었어요. 외국 책도 안 들어올 때였고, 신문에서 미술의 '미'자도 내주지 않을 때였으니까 오리진을 중심으로 해서 작가들끼리 모여서 해야 하지 않겠느냐 했지요. 최명영, 이승조, 나, 하종현 선생 이렇게 해서 전체를 만들어 보지 않겠느냐 했고, 김인환씨가 있었어요. 당시 몹시외로울 때였어요. 그림만 그리면서 강사로 나갈 때였는데 길이 안보이고 미래가 막막할 때였지요.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등산을 많이 다녔는데, 자기를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아니었나 봐요. 그러면서 김인환씨하고 몇이서 그런 얘기를 많이 했죠. 오리진에서 몇 작가 그룹별로 신전에서 한 두명… 그렇다면 홍대만 모이지 않겠느냐, 선배 작가와 뭐가 다르냐, 공유할 수 있는 생각을 같이 할 수 있는 좋은 작가가 있을 꺼다. 찾자. 이승조씨가 국전에서 국무총리 상을 탔던 심문섭씨를 찾았어요. 우리가 국전을 반대했고, 국전에 낸 작가를 넣을 거냐 말 거냐 했는데 그 양반 작품이 국전에서 상은 탔지만 새롭고, 그러한 것이 새로운 것을 가져올 때다 해서 박석원, 심문섭, 김인환, 오광수씨, 또 그때 이일 선생님이 오셔서 좋은 글을 많이 남기면서 그때 젊은 작가들에게 프랑스의 미술에 대한 새로운 것을 비교적 새롭게 알리셨죠. 오리진 운동하기 전, 67년도 오셨어요. 그래서 그 분들에게 얘기를 해서 미술 서적을 만들어 외국의 미술을 소개하고 평론가들은 그림에 대해 논리적으로 전개시켜 가려고 했지요. 우리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는지를 글로 넣고, 우리 미술을 소개하고 알리자. 그래서 작가와 평론가들이 합치기 시작한 거죠. 하종현 선생님도 들어오셨고, 그 이후로 지방 작가를 찾아보자 해서 대구의 김구림씨, 이강소씨 등 지방에 있으면서 외롭게 작업하는 작가들을 물색하자 해서 그 양반들은 두 번째 모였어요. 그렇게 해서 큰 형성을 갖게 된 거죠. 이름도 아방가르드의 약자. AG라는 이름을 달아서 첫 전시를 국립현대미술관, 지금의 경복궁 안의 민속관 자리에서 우리 나라에서는 전무후무하게 작가들이 돈을 모으고, 원고를 쓰고, 기사를 만들어 스스로가 책을 냈어요. 첫 호의 표지가 내 기하학적 추상작품 사진이었어요. 결론적으로 현대미술 하는 작가들이 새로운 미술운동의 전개를 위해 평론가들과 같이 했던 것이었어요. (…)

    ⎯ 오: AG는 결과적으로 4권의 책자와 4번의 전시를 갖고 해산되었죠 당시 활동은 어땠습니까? 반향이 컸었을 것 같은데요

    서: 1900년대 유럽에서 다다와 같이 세계사적 운동이 일어났다면, 우리 나라에서 AG는 한국 초유의 미술운동으로서는 가장 큰 중심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부정을 통한 새로운 미술이고, 하나의 논리를 중심으로 이론을 구축한 미술운동으로는 처음이라고 단언해요. (…)

    ⎯ 오: 당시로서는 전시의 외형적인 규모도 규모겠지만 이론의 중요성을 의식한 평론가들의 가세(加) 등은 기존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행동방식이었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것이었던 것 같습니다.

    서: 운동만이 아니라 새로운 실험성의 구현에 대한 확립을 가져왔기 때문에 그게 굉장히 커요. (…)

    지금하고는 달라서 당시 우리 나라의 상황은 현대미술이 잘 이해가 되지 않고 이해나 호응도 없었어요. 그 속에서 자신들의 주장을 이해시켜 가기 위해서는 힘있는 운동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운동이 많이 일어났다고 봐요. 현대미술이 빨리 발전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러한 운동 에너지, 힘이 있었기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거지요. 작가들이 각자 혼자서 자기 것만 했다면 물론 작가도 생겨날 수 있었겠지만 현대미술이 급진적으로 발전할 수는 없었다고 봐요. 중요한 것은 하나보다는 열의 소리가 크다는 논리였다는 거예요. 에너지를 모아 발산해 가자는 생각을 많이 가졌어요. (…)

    ⎯ 오: 선생님 작품에 대해서 초기부터 기하학적 추상작품을 발표하셨는데, 학부 재학시절부터 기하추상에 대해 습작과정이 있었습니까?

    서: 학부 때는 그런 게 없었고, 나이가 어렸으니까 여러 가지 실험적인 것을 많이 했지요. 평면적인 것은 고갱에 대한 여러 가지 사상, 성장과정, 작품성을 좋아하면서부터 뎃생에서 평면화시키는 것을 1학년 때부터 했거든요. 누드도 그런 작업을 많이 했어요. 오리진하면서 추상으로 넘어와서 3학년부터 자유제작을 하게되고 자유롭게 작품을 할 수 있었거든요. 누가 구속을 하지 않고 선생이 자기의 작품을 답습시키지 않은 것이 나를 만들어 줄 수 있었던 중요한 요소였어요. 오리진을 하면서 나가서 발표를 해도 막지 않았거든요. 딴 대학은 오히려 관제다 뭐다 해서 독려하지 않고 막았거든요. 기하학적인 것은 잠재적으로 갖고 있지 않았는가 생각되고, 졸업한 후에 그림의 기초가 되는 것이 그때 우리 미술에 민화가 굉장히 새롭게 대두됐어요. 6, 70년대 전후해서 인사동을 중심으로 골동품, 고미술에 대한 관심이 높았어요. 나부터도 작은 그림을 사려고 다녔고, 토기도 사고, 아현동, 동숭동에 가면 골동품 집이 많았어요. 선배들도 그렇고 찾아다니면서 우리의 것이 무엇인가 찾고 다닐 때였어요. 민화 중에 <서가>라는 그림이 있어요. 책거리 그림에 관심을 갖고 찾아다녔지요. 앞뒤가 구분이 없는 그림으로 작가미상으로 소개되는 책상을 그렸는데도 배경이 없어요. 세잔 같이... 조선시대니까 세잔 앞선다는 것이죠. 평면이 아니라 투시로 봤고, 선이 굵게 나오고, 색채성이 강하고... 우리는 이런 게 있지 않느냐, 그런 것을 발견했고... 대학을 졸업하고 작가로 나갈 때니까 과연 우리의 그림이 무엇이냐, 내 것이 무엇이냐. 전통성을 주장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떠한 배경 속에서 잠재적으로 발견되어지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할 때였어요. 또 한가지는 저는 어려서부터 한옥에서 자랐어요. 대청마루를 나가면 안방에서 문을 열 때도 완자문양 문살이 있지 않습니까? 역으로 삼각형이 된 기하학적 무늬라든가 창호지의 흰색이라든가, 보름달에 비치는 색 그런 것이 참 기억이 많이 납니다. 문이 찢어지면 할머니가 뭘 덧붙이는데 한 장 분일 때, 두 장 붙일 때 색이 굉장히 다르고 한지의 색이 다 달라요. 또 안방의 벽장에 민화 그림이 있었어요. 아주 그런 집 구조에서부터 생활하는 거에서부터 그런 데서 살아왔단 말입니다. 또 빼놓을 수 없는 게 맹인제 선생님이 한국미술사를 가르치시면서 박물관 등에서 현장 교육도 시키셨고 우리의 얼을 교육시키셨어요. 그때 굉장히 관심 있게 봤고, 제대하고 박물관을 굉장히 많이 다녔어요. 도자기의 선과 색을 가지고 무심하게 크로키를 굉장히 많이 했어요. 어쨌든 백자에 대한 것, 생활에서의 창호지, 내가 갖고 있는 환경, 구조, 마당이 넓은 집에서 자란 정서적인 배경 등 종합적인 것이 나로 하여금 그렇게 될 수밖에 없지 않았나 생각해요.

    72년도 기하학적 추상으로 개인전을 하면서 흰색을 중심으로 한 AG 작업할 때는 화선지를 겹쳐 붙이는 것으로 300평 이상 되는 공간을 나혼자 감당했어요. 물성은 몰랐고 다만 종이를 통해서 우리의 얼이 그것이 아니겠는가 했지요. 한쪽에서는 흰색으로 기하학적 그림을 그리고 AG 운동할 때는 평면적인 것보다 오브제를 중심으로 하자는 게 있었어요.

    ⎯ 오: 오브제를 나름대로 해석하신 것이었군요.

    서: 그렇죠. 그러한 바탕으로 기하학적 작품을 했고 70년대 전반에 프레스센터 1층에 있는 화랑에서 첫 번째 개인전을 했어요. 그 때 작품이 훤색을 겹쳐 쌓는 것이고, 67년도에 현대판화협회 창립전에 발표할 때도 흰 창호지를 배접해서 한지에 판화를 찍었어요. 외국에서 공부한 사람이 켄트지에 찍을 때 처음으로 배접한 한지에 찍었어요. 기하학적 작품으로 판화를 발표하고, 과거 그 작품을 한국의 전통판화전에 냈는데 갖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팔지 않았어요. 그때 낸 것이 흰색을 발라가면서 색의 변화, 기하학적인 검정 색의 것이었죠. 그때 우연하게 동야박명이 한국을 처음으로 방문해서 내 개인전에 왔어요. 그때 어쩌다가 박서보 선생이 통역을 했는데, 어떻게 이런걸 그리느냐. 한국에는 앵포르멜 액션페인팅만 있는 줄 알았는데 하더군요. 캔버스의 텍스추어를 없애준 물감과 물감이 중첩되어지고 미묘한 색의 맛을 내고 기하학적 선이 들어가고 67년 일본에서 열린 청년작가전에 대표작가로 냈었는데 그 작품을 냈거든요. 어떻게 된 거냐 해서 지금처럼 똑같이 “한국의 얼, 백의민족이라는 흰색, 전통적 한옥에서 오는 한지의 맛이다. 한지라는 것 자체는 뽀얗다. 도자에서 오는 흰색의 덤덤하면서 다부진 맛을 내 작품에 하고 싶어 표현한 거” 라고 말했어요. 그때부터 그러한 것을 발판으로 해서 기하학적 추상의 정신적 배경으로 작품을 한 거지요. 그 후 한참 후에 80년대 일부 평론가가 하드엣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나는 그런 게 있는 지도 몰랐어요. 하드엣지로 몰고, 모노로 몰더군요. 난 그게 아닌데, 그것과 관계없이 일본에도 가보지 않았고 『미술수첩』도 들어오지 않았고, 기껏 책이 들어왔다고 하면 중국 대사관 앞에서 외서를 팔았는데 추상표현주의 책밖에 없었어요. 그것만 볼 때였거든요. 뒷 얘기를 듣고 서글펐고, 그런 식으로 작가의 배경도 모르고 젊은 평론가들이 연계, 대립, 종속시키려는 것은 굉장히 잘못됐다고 봐요.

    ⎯ 오: <동시성>이라는 타이틀을 오랫동안 써오셨는데 선생님 작품의 <동시성>은 어떤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까?

    서: 60년대와 지금의 ‘동시성’의 개념은 차이가 있지요. 근본적인 것은 처음에는 한 화면에 여러 성격을 가진 색과 형과 면이 동시에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는 뜻으로 붙였던 거죠. 동시대에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는 뜻으로 붙였던 거예요. 요즘 와서는 동시성이라는 것 자체가 정신적 배경과 나라가 갖고 있는 사상적인 것과 화면에서의 동시에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보지만 그 당시는 단순한 생각을 갖고 만들었던 거예요.

    ⎯ 오: AG 시절의 작가 분들이 모노하 경향의 설치작업을 많이 했는데, 선생님은 평면작품을 계속 하셨어요. 특별한 이유가 있었습니까? 아니면 평면에 대한 독특한 집념이 있었습니까?

    서: 집념이지요. 아집이 될 지 모르지만 결국 평면에 비해서 오랜 정신적 유산을 만들어 주는 건 그것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고, 평면에서 해야 될 것 도 많다고 봐요. 평면이라고 해서 공간을 못 만드는 것도 아니고 평면 속에서 정신을 못 담는 것도 아니고 단순한 것은 아니라고 봐요. (…)

    ⎯ 오: [71년 무라마쓰 화랑에서 개인전 할] 때 무슨 상을 받으셨지요?

    서: 미국대사관에서 주는 상금이 있었어요. 명동화랑에서 공모전을 한 것에서 그랑프리를 탔어요. 대상의 상금으로 일본에서 한 달간 체제할 수 있는 정도의 그랜트를 줘서 그것으로 일본에 가서 전시를 했어요. (…)

    ⎯ 오: 선생님의 경우, 여러 자료를 통해 백색주의에 대해 항간의 인식과 사뭇 다른 말씀을 하셨는데…

    서: 당시 동경화랑 야마모토 사장이 한국을 오게 됐어요. 제가 개인전을 하면서 뵙고 그 분 댁에도 갔었고 한국에 돌아왔는데 73~74년도 한국에 오셔서 화실을 방문하셨어요. 한국의 현대작가들이 운동을 하고 있다니까 젊은 작가를 찾자는 뜻도 있었던 것 같고 한국 화단의 상황도 보겠다는 거였지요. 일본 최고의 화랑 주인이 왔다니까 관심이 많았지요. 그때 작업실에서 작품을 다 보여줬어요. 수치스러운 얘기지만 그때는 100호 캔버스 천이 없어서 다 꼬매 갖고는 100호를 만들어 그림을 그리고 했는데 꿰맨 자국이 보일까봐 밑 작업으로 흰색을 칠했어요. 그 양반이 흰색을 굉장히 매력 있게 보시면서 “그런 걸 숨기면 안 된다. 작품으로 작품성을 해야지...” 한국에서는 이 천이 안 나올 때고 물감도 안 나온다는 얘기에 그 양반이 기가 막힌 거지. 이러면서 현대미술을 한다고 그림을 그렸구나 격려를 하면서… 사실은 오히려 그 때문에 그네들의 색이 아닌 것을 만들 수 있었던 건데. 독자적인 색을 만들 수 있었던 거라고 보거든요. 웃지 못할 그런 것도 있었는데… 첫 번에 화실을 찾아와서 백색에 대한 것을 보고 갔어요. 그 다음에 한국에 오니까 백색을 쓰는 것이 독특하고 일본에 없는 색상이라고 하더군요. 두 번째 왔을 때 화실에 또 왔고 더 많은 작가들을 보고 싶어했어요. 자기가 백색군을 만들어 동경화랑에서 전시를 하면 되겠다고 일본에 없는 흰색을 그리는 작가들만을 테마를 잡고 그때의 작가들을 모았던 것이죠. 날 중심으로 해서 한국 작가들을 한국어로는 한국의 흰색전이라고 하고, 일본어로는 한국백색전이라고 썼어요. 우리 것을 발견해 준 것이지 일본의 영향과 아무 관련이 없어요. (…)

    7, 80년대 나카하라 유스케, 미네무라 도시아키 등 일부 젊은 비평가들이 한국을 드나든 것만은 사실이지요. 그 이후에 자신들의 지배적 영향이라든가, 자기들의 모노적인 것의 영향을 받았다던가, 정치적으로 하려고 할 수는 있겠지만, 저는 반대로 우리의 독자적인 것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합리화가 아닌가라고 봐요. 모든 역사라는 것이 그렇잖아요.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맥락에서 모든 것을 귀결시켜 놓으려고 하는 것일 지 모르겠지만, 나는 좀 다르게 해석해요. 우리는 우리 것이 있다고 봐요. 물론 일본작가들의 영향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 해석은 좀 다르게 봐요. (…)

    ⎯ 오: 어떻게 보면 우리 현대미술은 아직까지 비평적인 차원에서는 무풍지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 최근 우리 나라 미술계 현상을 일종의 역사적인 퇴행이라고까지 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실제 구체적 작품 속에 녹아 있는 변별성을 찾아내고, 일본이나 미국 미술과의 차이를 찾아내 연구하고 체계적으로 비평을 전개해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일 선생은 당시의 “기하학적 추상이 국내 최초의 집단적 표명이지만 기하주의의 역사적 콘텍스트와 개념의 특성을 충분히 파악하지 못한 채 수용했다는 점에서 회의적 일 수밖에 없다”고 하셨습니다. 기하학의 논리적 일관성, 특성을 충분히 파악하지 못하고 일련의 기하학적 경향들을 감각적으로 수용했다는 말이지요. 심지어 “우리에게는 몬드리안이나 말레비치도 없고 전통이 부재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그런 평가에 대한 구체적 반박이 없었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다른 각도에서 해석이 진행 돼야 하지 않은가 하는데 선생님 생각은 어떠십니까?

    서: 슬픈 얘긴데 작가가 스스로 이론적 설정, 체계적 철학을 자신있게 들고 나오지 못했고, 그러한 백그라운드를 논리화시킬 수 있는 평론가를 못 가졌다는 것이 기하학적 추상에 대한 운동 자체의 순수성, 어떤 누구에 의해 일어나지 않은 자의식적인 부분이 정치화 못되는 것이죠. 지적하신 몬드리안, 말레비치와 우리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겁니다. 몬드리안은 자연주의를 바탕으로 평면성에 대한 색면이고 말레비치는 러시아의 감각적인 것이지요. 우리는 그것과 전혀 다른…

    ⎯ 오: 제가 읽기에도 당시의 평론가들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시고 있었으되, 현대미술에 대한 이해가 이런 일들을 감당하기에 벅찬 일들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서: 우스운 일인데 처음 67년도 연립전 할 때의 기사가 ‘자로 그린 그림’ ‘테이프를 대고 그린 그림’ ‘하얗고 노랗고 색깔이 있는 그림’이었어요. 경이적인 시각으로 보면서 경이를 표시했다는 말이지요. 지금 보편적으로 보여지는 것이 당시에는 그렇게 받아들여졌던 거지요. 기하학적인 것은 다시 주장하지만, 자의식적으로 발생되어진 거고, 앵포르멜에 대한 반발이었고, 무의적 행위에 대한 지각적 체험으로 논리적 그림을 그리려는 거였고, 어두운 색을 밝게 보려고 했던 거고, 정반대의 미학적인 입장이지요. 몬드리안을 보고 그렸다는 것은 전혀 관계없어요. 그 분들이 보고 온 것도 그 관점에서의 머리가 고정화 되어있는 관념성에 의한 해석이지 새로운 해석으로 논한다던가, 관점에서 평한다던가 했어야지 올바르다고 봐요. (…)

    ⎯ 오: 우리 나라 현대미술의 역사가 한 50년, 서양미술의 방대한 양에 비해 얼마 안 되는 시간이지만 구체적인 작품에 대한 연구, 자체 논리의 분석, 이론적 체계의 재구축이 불가피하게 요구되는 시점이라고 생각됩니다. 오늘 제가 선생님을 모시고 1차 인터뷰를 했습니다만, 구체적인 연구와 분석을 위해서는 좀 더 많은 도움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번거로 우시겠지만 많은 도움을 주셨으면 합니다.

    서: 시대적 상황과 지역적 괴리가 있어서 그래요. 전체적인 상황 속에 각국의 고유한 현상을 집어넣으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겁니다. 우리만이 갖고 있는 특성을 도출할 수 있어야 되고, 그것을 기초로 반대로 논리화시켜 가는 것이 필요한데 그게 부족하죠.

    ⎯ 오: 흔히들 크리틱의 개념을 깍아 내리는 비판으로 받아들이지만 그보다는 하나와 또 다른 하나 사이의 차이를 명료하게 함으로 해서 차이에서 생겨나는 가치를 확보해 가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기회에서는 전체적인 흐름을 주로 다루게 되겠지만 이것을 토대로 다시 구체적인 내용을 깊이 있게 다룰 수 있게 될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늘 긴 시간 동안 대답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서: 고맙습니다.

    오상길 진행

  • ✦ 『갤러리 가이드』 제78호(2000) 수록

    ⎯ 김설류(이하 김): 이번에 출품하는 작업들에 대해 소개한다면?

    서승원(이하 서): 90년도 이후부터 작품의 변화를 조금씩 가져왔다 스스로의 문제를 고민하고 주저했던 기간도 꽤 길었다.

    이전의 작업이 기하학적 추상으로의 확산을 그린 작업이었다면, 이번에 발표할 근작들에서는 기하학적 추상으로 해체된 그림을 그렸다. 보다 원만하게 이루어지는 평면 구성의 바탕아해 초탈과 초원의 의미를 담았다. 이전의 작업이 논리적이고 구조적이었던 그림이었던데 반해 이번엔 비논리적이며 감성적인 세계로 빠져든 셈이다.

    이번에 발표할 작품들은 90년대 이후의 작업이 대부분이다. 처음엔 신, 구식을 같이 발표할 생각이었다. 결국 최종적으로는 그동안 했던 작품의 결정체만 보여주자고 결정했다. 93년부터 기차하저이며 체체자로 구성한 작품들 가운데 대표적으로 잘 표출한 작품만을 갖고 전시할 계획이다.

    ⎯ 김: 작품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듣고 싶다.

    서: 공간과 색채의 다양성을 배제하고 내면의 감성을 전제로한 단색의 모노톤을 주조로 했다.

    색에 있어서는 환원되어진 색, 환원되어져 가는 과정을 나타내고 단순히 가시적으로 나타나는 색은 최대한 배제하고자 했다.

    예술품 중 ‘조배자’의 특징이랄 수 있는 흰색의 다양성, 행의 다양성, 덩어리의 다양성 등 단조로운 듯 하나 그 색채와 형태, 덩어리가 다양하다는 느낌을 주는 전통적 특성을 우리 회화에서도 달아야 된다는 인식이 바탕이 됐다. 이런 생각은 젊은 시절부터 기조로 삼아온 문제이기도 하다. 따라서 백색중심의 작품이 많다.

    색을 많이 안 입힌 절제미를 보이고, 그림에 관한 형식론에 기인한 마티에르나 질감이 있어야 한다는 인식에서 벗어나 그렇지 않아도 그림을 이룰 수 있다는 걸 보여주려 한다

    단적으로 보이지 않는 그림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경계선을 드러내지 않고, 공간과 공간의 구분도 없앴다. 깊이 있고 촉촉히 젖어들어가는 내면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기분을 살리고 싶었다.

    ⎯ 김: “동시성”이라는 일관된 테마를 추구해 왔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서: 60년부터 작업해온 시상이라는 테마에는 순수회화'에 관한 단일문제를 고집하는 내 나름의 생각이 내재돼 있다.

    요즘이 최하는 그린다는 것 보다는 인간의 감성을 기계를 통한 즉, 인간의 인위성을 가미하여 만들고, 설치하는 인위적인 손으로 구성해 나가고 있다. 가시적이든 비가시적이든 내면세계를 손끝으로 표출함 때 진실이 나타날 수 있는데, 요즘은 그런 작업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따라서 그에 반한 요즘 제기되는 ‘회화의 회귀’ 에 관한 문제를 깊이있게 보여주고 싶었다. 입체나. 설치, 사진의 장르가 보편화되면서 회화의 설자리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

    나름대로 잠도 못이루며 고민해 온 근본적인 문제를 파헤치고 결혼에 더다른 것이 ‘회화의 복귀’ 라는 측면에서 고민해 온 문제들이었다.

    과학이 아닌 인간적인 것을 찾고 싶은 바램이 담겨 있다. 인상주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 미술 개념으로의 근본적인 회귀이념이 내 회화의 내재된 의식이다.

    ⎯ 김: 지난번 동경에서 초대전을 가졌던 걸로 안다. 그때의 반응은 어땠는가?

    서: 현지의 평론가나 작가들의 반응이 다행히 좋았다. 당시 저명 평가가 이런 말을 했는데, 즉 ‘일본회화는 죽었다, 한국평면회화를 따라가기는 어려울 것이다’는 것이 그의 말이었다. 조금씩 자신감을 가졌다. 이전까지만 해도 과거에 너무 한 경향으로 몰두해 온 것 같아서 변화를 주고 그것을 외부에 선보인다는 것을 많이 망설였다. 작품 변화 후 국내에서는 부산시립미술관과 광주비엔날레를 통해 조금씩 선보이며 그곳에서 얻어 낸 평가도 다행히 나쁘지만은 않았다.

    그럼에도 신작을 할 때면 두렵고 조심스러운 건 여전히 마찬가지다. 쉽게 발표를 결심하지 않은 것도 좀 더 심층적으로 확실하게 나 자신을 다지기 위해 신중히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서였다.

    ⎯ 김: 작품의 변화를 추구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무엇인가?

    서: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 쉽지 않음에도 한편으로는 그래야만 한다는 당위성 아래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갈등하는 모든 내면의 생각들이 다 힘들다.

    ‘고인 물은 썩는다’ ‘격동하는 물이 파동쳐서 가는 모습을 몇 번 쯤은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이 작가의 소명인 이상 그 과정에서 거는 기대나 두려움 역시도 힘들게 했던 부분 중의 하나이다.

    작품하며 늘 느끼는 것이지만 내 화실벽에 갇혀서 아무도 안 만나고 새벽 2~3시까지 견디면서 벽을 허물려는 고뇌는 아무도 이해못할 것이다. 외부적인 것을 차단하고 스스로를 고립적인 상태에 몰아넣고 내면의 경지에 빠져야 될 때, 또 그렇게 그려진 것을 다 지워내야 할 때 가장 큰 고통을 느낀다. 어떤 작가는 그 심성은 공통적으로 느끼는 부분일 것이다. 내 그림에 대한 자신을 못 갖고 부정하고 다시 지워야하는 심정이 가장 힘들게 한다.

    많이 덧칠하지 않아도 하나의 자욱이 남을 수 있다는 것, 지워지는 속에서 만들어지는 그림, 지워나가는 시점에서 멈춰야 한다는 것이 가장 큰 두려움이기도 하다. 시작과 끝이 가장 어렵고, 끝을 내기 위해서 힘든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역시 쉽지 않다.

    사랑하는 사람을 곁에서 봐야 그 사람의 눈동자를 보고 느낄 수 있듯이 내 그림도 그렇게 보여졌으면 좋겠다. 색의 디테일한 공간성을 느끼고, 색이 묻히고, 바래져 나가면서 그림의 질서가 이루어지는 것에서 나름의 묘미가 있을 것이라고 여긴다.

    ⎯ 김: 앞으로 계획이 있다면?

    서: 추상의 순수성을 드러내는 작가는 아마도 우리 세대가 마지막이 아닐지 싶다.

    나 역시도 20대부터 백색의 평면성을 주조로 한 작품을 일률적으로 표현했다. 지난시절 여러 가지로 다양한 색도 써보려고 노력해 봤지만 결국은 “나는 나다”라는 길 깨닫게 되고 소위 해제되고 무너지더라도 평면에 관해서는 즉, 형, 색, 선에 관하여 늘 초지일관 했다는 점이다.

    단지 해체할 뿐이지, 기하학적인 것은 늘 존재하였다. 시행착오를 겪으며 물질의 소모도 무척 많았었다.

    이러한 과정을 밟은 작가들을 또 그들의 그림을 보는 관람자는 최소한 그들의 심혈을 존중해주는 마음을 가져주었으면 좋겠다.

    요즘은 학교(홍익대학교)의 보직을 맡고 있어서 시간이 없는 것이 가장 안타깝다. 학교 일을 마친 후엔 될 수 있으면 회실로 항히려고 한다. 물론 마음먹은대로 되진 않지만... 적어도 평균 여섯, 일곱 시간은 파묻혀야 마음이 편하다.

    앞으로 추구해야 할 작업의 연속성을 고심하는 것이 가장 큰 과제이기도 하다.

    김설류 진행

  • ✦ 『미술시대』  제9호(2000) 수록

    60년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줄곧 ‘동시성’이라는 주제로 작품세계를 이끌어 온 서승원은 이일 선생님이 분류하는 이른바 한국의 ‘제2세대 추상미술’ 곧 앵포르멜에 이은 새로운 ‘기하학주의’ 추상미술 형성에 있어 중심적 역할을 하신 분이다. 초기의 작품에서 보여주던 엄숙한 기하학주의적 경향은 점차적으로 변화하여 지금의 작품 경향으로 바뀌었는데 근간 그가 작품에서 추구하고 있는 것은 확연하게 ‘드러냄’ 보다는 전체와의 어울림 속에서 ‘드러내지 않는 조화의 미’를 추구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그는 지난 세월 한국미술을 이끌어 간다고 할 수 있는 홍익대학교에서 오랫동안 후진 양성에 힘써 오신 분으로 사실상 한국 미술문화 형성에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신 분들 가운데 한 분이시다. 이러한 분에게 한 시대의 미술문화 형성에 참여한 체험담과 당시의 상황에 대하여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동시대 미술문화를 연구하는 필자에게 있어서는 즐거운 일이며 매우 홍미로운 일이다. 개인전 준비에 여념 없는 선생님께 시간을 얻어 몇가지 질문을 드려 보았다.

    ⎯ 오세권(이하 오): 홍익대학교라면 사실상 국내 미술문화를 선도해 나가는 학교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러한 홍익대학교 교수님이라는 중책은 사실상 우리 나라 미술문화의 최전선에서 지휘하고 계신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막중한 임무에 책임감은 상당하리라 생각되는데, 선생님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서승원(이하 서): 홍익대학교는 한국 미술문화 형성에 있어 살아있는 역사의 장소이며, 교육의 장소입니다. 그리고 한국 미술문화를 이끌고 나아가는 대학이며, 아울러 선구자적 입장에서 새로운 조형 실험을 통하여 미술문화를 개척하면서 만들어 가는 대학이기도 합니다. 저는 젊어서부터 홍익대학교에 재직하여 왔는데, 책임감에 힘든 세월이었지만 그동안 교육자로서 책임을 다하려고 노력하여 왔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제 개인적으로는 작가로서 조형적 실험성을 가진 작품을 해왔습니다. 이는 세계 미술문화 속에서 우리 미술문화가 앞서 나아가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이었습니다. 또 그 실험성이 바탕된 정신으로 학생들을 가르쳐 왔던 것입니다. 새로운 이념과 개혁적인 정신이야말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교수의 정신이고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분명한 것은 홍익대학교 교수로서의 책임은 미술문화 형성에 있어 남보다 더 많이 연구하고 비젼을 제시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 오: 그러면 우리의 미술대학 교육이 어떠한 방향으로 흘러가야 할까요? 저는 각 대학마다 특성화된 미술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A대학은 서양화, B대학은 한국화, C대학은 조소, D대학은 디자인 그리고 그렇게 분리된 가운데 있어서도 더 세분화시켜 특성화하는 과정을 거쳐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과 같이 백화점에서 서울이나 지방에 특성 없이 똑 같은 상품을 진열해 놓고 파는 것과 같은 교육 현실은 바꾸어 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자면 현재 대학 교육에 몸담고 계시는 분들이 자신의 자리를 포기해야만 하는데, 지금 현실에서 그러한 특성화 교육이 가능할까요?

    서: 저는 대학교를 특성화시키는 것에 찬성합니다. 오늘과 같은 정보화 시대 속에서 대학은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가 하는 것을 깊이 생각하여야 할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대학이 앞서야 나라가 바로서는 것입니다. 미술대학이란 단순히 기술과 기능만을 가르치는 곳이 아닙니다. 미래지향적인 미술교육을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과거 지향적이거나 머물고 있는 미술표현은 박물관에 가야할 미술인 것이지요.

    교육자란 하나의 씨알과 같은 역할을 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땅에 파묻혀 새로운 싹을 트게 만드는 것이지요. 교육자는 후배에게 건강한 정신성을 남겨 놓아야 합니다. 비록 자신의 기득권을 상실할 지라도 교육의 방법이 올바르게 흘러가도록 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미술문화를 발전시켜 나아가는 원동력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미술 교육자는 자신의 스타일만을 학생들에게 강조해서는 안됩니다. 자신의 아집과 고집을 강조하면 발전을 하지 못합니다. 이제이 시대가 무엇을 원하는가에 대하여 생각하여야 하고 그에 맞추어 변혁과 개혁을 해야할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 오: 그러면 선생님 작품세계로 이야기를 돌려보겠습니다. 선생님은 오랫동안 ‘동시성’이라는 주제로 작품을 해 오셨는데 동시성이란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까. 일반 감상자도 이해가 가도록 쉽게 설명해 주십시오.

    서: 60년대 중반부터 ‘동시성’이라는 제목으로 이념적이고 논리적 작품을 발표하였는데, 그것이 오늘까지 이르렀습니다. ‘동시성’이라는 의미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공간 속에서 평면성이란 문제를 해석한 것입니다. 즉 그림을 이루는 공간과 형태 그리고 색 등이 평면 위에서 동시적으로 발현한다는 것입니다. 곧 그림을 이루는 조건들의 ‘동시적 조화성’을 말하는 의미에서 ‘동시성’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가시성과 불가시성의 동시적 상황을 말합니다. 이는 초월적인 ‘동시성’을 말하기도 합니다.

    여기에 또 하나의 의미를 더해 본다면 정신적 ‘동시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나와 작품이 함께 하나되어 조화되는 것을 말하지요. 곧 작품과 내가 서로 다른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 동시에 화합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논리들을 한꺼번에 말해본다면 조형성의 합일화 작업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제가 일찍이 주장하였던 이러한 ‘동시성’ 작품들이 60년대에 태어나 30년이 넘어선 지금까지 조형 실험을 통하여 실현하여 가고 있으며, 점점 논리화되어 가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 오: 제 기억에 90년 개인전 이후 계속해서 그 이전에 나타내던 이지적인 기하학적 사각 형상들을 해체시키려고 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은 또다른 변화를 보여주고 계시는데, 계속 해체 시켜 가시는 중인가요? 아니면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실험적인 경향인가요? 작품이 변화되어 온 과정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서: 저의 작품 변화를 두고 이 일 선생님은 ‘환원에서 확산’의 개념을 말씀 하셨는데, 저는 그 말씀에 동감합니다. 저의 초기 작품은 기하학적인 작품이었습니다. 사각의 테두리가 뚜렷한 작품세계였는데, 마치 하드에이지와 같은 딱딱하고 강한 기하학적 형태를 지닌 작업이었습니다. 그러던 작품세계가 90년대 들어 다소 변화하였습니다. 여전히 기하학적 형상은 있지만 사각 공간들은 개방되어 주변의 다른 공간과 상호 침투되어 있습니다. 그리하여 기하학적 사각형의 면과 바탕을 평면 속에 통합시킴으로써 보다 자유롭게 확산시켜 가는 작품세계를 펼쳤던 것입니다. 그때 평자들은 작품세계가 이전의 이지적인 세계로부터 따뜻한 체온이 느껴지는 감성의 세계로 바뀌었다고 했지요. 그러던 것이 근자에 들어서는 사각의 기하학적 형상이 사라졌습니다. 형태자체가 정제되고 무화(無化) 되었다고 볼 수 있겠지요. 곧 이전에는 선을 강하게 나타내어 드러내는 작품을 하였다면 근자에는 선이나 색의 성격을 드러내지 않고 주변이 만들어 놓은 색들 속에 덧붙이는 색이 스며들어가는 것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곧 주변에 놓여있는 여러 가지 색들이 어울리면서 서로 배어 들어 일체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초기의 환원적 작품에서 90년대에 들어서는 확산적 작품으로 변화하였으며 근자에는 형태의 해체를 통한 ‘드러내지 않는 조화의 미’를 추구한다고 할 수 있겠지요.

    ⎯ 오: 평자들 중에서는 선생님의 작품 경향을 미니멀류로 진단하기도 합니다. 선생님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아니라면 국내의 다른 미니멀 경향 작품들과 선생님 작품과의 차이점 또는 특성을 말씀해 주십시오.

    서: 저의 작품은 미니멀계열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전 작품들은 기하학적 추상에 더 가깝겠지요. 미니멀 작품들은 단순성이라는 특성적인 요소가 많습니다. 그러나 저의 작품들은 보시다시피 단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저의 이전 작품들은 기하학적이면서도 환원적인 요소가 많았습니다.

    작품에는 그 작가만의 개성과 특성, 사상이 있고 고집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리고 작품을 하는 사람은 끊임없는 노력으로 자기 것을 펼쳐야 합니다. 작품을 개체성으로 이해해야지 여러 작가를 한꺼번에 묶어서 판단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합니다.

    ⎯ 오: 그렇다면 초기 기하학적 추상계열의 작품은 선생님의 실험적 의도였습니까. 아니면 당시의 유행에 따른 것이었습니까?

    서: 저는 4.19세대입니다. 4.19세대의 특징이 과거의 주어진 환경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개척해 나아가는 세대인 것입니다. 우리 것을 스스로 찾는 세대였던 것입니다. 제가 초기에 기하학적 추상의 작품을 제작할 때만 하여도 국내에서는 기하학적 추상을 하는 작가가 없었습니다. 저의 초기 작품은 당시의 유행이 아니라 스스로 새로운 미술을 찾다가 자연스럽게 획득한 경향입니다. 스스로 깨우친 것이지요. 곧 당시 액션페인팅이나 앵포르멜 미술문화의 획일에 반대하고 저항하는 논리적 미술표현으로 기하학적 추상을 추구한 것인데, 과거에 머물지 않고 저만의 작품세계를 찾아 나서다 추구한 작품의 경향입니다. 이후 많은 작가들이 기하학적 추상을 추구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 오: 대개의 작가들이 자신의 작품세계에 ‘한국미’가 배여 있음을 강조합니다. 선생님께서는 동시대적 한국미를 어떻게 생각하시고 있으며 또 자신의 작품에서는 어떻게 발현되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서: 저는 어릴 적부터 한옥에서 자랐으며,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늘 한복을 입고 생활하시는 전통 있는 가문에서 교육을 받고 생활하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어릴 적부터 철저하게 우리 것을 몸 속에 담고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저는 이미 성격상으로 철저한 한국 사람이기에 저에게 있어 한국성은 스스로 발현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동시대적 한국미는 전통미와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곧 ‘창조미’야말로 진정한 동시대의 한국미가 될 수 있겠지요.

    굳이 전통미와 연관된 부분을 저의 작품에서 찾아본다면 몇 가지 언급해 보겠습니다. 일부에서는 ‘백색’을 운운하며 한국미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데 저는 70년 개인전에서 이미 백색을 바탕으로 하는 작품을 발표하였습니다. 당시 저는 백색의 의미를 이미 학창 때부터 제 개인적으로 공부하여 왔던 조선조 백자의 색에서 받아들여 선택한 것입니다. 백자에는 세련되지는 않았지만 백색이 다양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그리고 규칙에 매이지 않고 성격이 없는 것 같으면서도 성격이 강한 백자의 특성에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을 저는 작품에 나타내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또 하나 밝힐 것은 저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사각 형태는 조선조 민화의 책거리 그림에서 나타나는 형태를 재해석한 부분이 있습니다. 책거리 그림을 잘 보시면 시점이 이상하게되어 원근법으로 따지자면 앞면이 크고 뒷면이 작아야 할텐데 거꾸로 나타나 있지요. 그런데도 그림이 이상하게 보여지지 않습니다. 저는 그것을 보면서 시점이 다르게 나타나는 사각의 형태도 얼마든지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고 결국 저의 작품에 그 사실을 끌어드렸습니다. 저의 이전 작품을 자세히 보시면 사각형의 부조화 속에서 나타나는 조화나 사각형이 주는 일루젼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어릴 적 우리 집이 한옥이다 보니 문은 자연스럽게 창호지로 된 격자형 문살의 한옥 문이었습니다. 매일 열고 닫았던 문살의 격자형 이미지도 훗날 저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사각 이미지에 영향을 주었지요. 그리고 특히 어릴 적에 창호지가 구멍이 나거나 찢어지면 그 부분을 새로운 창호지로 덧붙이는데 새로 붙인 창호지와 기존의 창호지가 서로 배타하지 않고 어울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서로 합일되어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지요. 또 창호지를 동하여 달빛을 보면 은은하게 비춰지는데, 반투명의 창호지 속에 비치는 달은 혼이 있는 듯 합니다. 이러한 서로 배타하지 않고 은은한 색채의 이미지들을 제 작품 속에 담아 보려고 하였지요. 근자의 작품에서는 이러한 면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 외 저의 작품에서 전통미를 찾으려면 많은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동시대 한국미는 ‘전통미’에서 보다는 오히려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창조'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오: 선생님께서는 한국 전통미에서 나타나는 특성에 대해서 약간의 언급을 해주셨는데, 그러면 근간 선생님이 추구하는 작품과 서양 작가들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느낌의 차이점을 전통미에서 나타나는 색채의 사용을 예로 들어서 말씀해 주십시오.

    서: 같은 색면이라도 서양의 작가들은 색면에 신체성 곧 액션적인 면이 많이 들어가 있으며, 그 색채의 성격 또한 뚜렷합니다. 가령 마크 로스코 작품 등에서 이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의 작품에서는 정신성이 더 많이 나타나지요. 그리고 색채들은 성격을 드러내지 않고 정제되어 주변색 속에 어울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아까 말씀드린 구멍난 창호지 부분에 새로운 창호지로 덧붙인 이미지를 연상하면 됩니다. 마치 산사에서 들을 수 있는 물, 종, 풍경, 바람, 풀벌레,… 등의 소리들이 제각기 자기 소리를 지니면서도 자연과 합일되어 조화를 이루듯이 저의 작품에서도 주변의 색과 일체가 되어 나타나는 색채를 추구합니다.

    ⎯ 오: 선생님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데 있어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지면상 많은 이야기를 다루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오늘날을 사이버 시대라고 하는데, 사이버 시대에 선생님이 느끼시는 국내 미술문화 현장의 느낌에 대하여 간단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서: 시대의 변화는 있어야 하고 또 필연적입니다. 시대에 맞추어 컴퓨터 등을 통한 작품을 하는 사람은 그에 대하여 열심히 연구하여 우리만의 특색 있는 미술문화를 창조할 수 있어야 하고, 또 이전부터 해오던 작품세계가 있는 사람은 자신의 작품세계를 한층더 발전시켜 우리 미술문화의 발전에 일조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떠한 작품을 할 것인가 하는 것은 작가 스스로의 판단이라고 생각합니다.

    한편 근간 젊은 작가들의 작품 가운데에서는 외국 작가의 작품을 모방한 것 같은 작품도 볼 수있고, 진지함보다는 순간적 효과만 나타내어 시선을 끌어 모으려 하는 작품들이 보여집니다. 좀더 창의적이고 노력하는 투철한 작가 정신이 필요한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대담이 있었으나 지면상 채 담지 못한 부분이 많다. 말씀 가운데 몇 부분만 축약하여 전달하려 하니 오히려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고 불편만 끼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대담이 끝날 때쯤 평소 차갑고 날카롭게 기억되던 그의 얼굴이 온화하고 부드럽게 보여졌다.

    오세권 진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