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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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트인컬처』 제25권 제1호 (2024) 「Special Feature: Creation」 중 일부
새해를 맞는다. 이미 팔십을 훨씬 넘겼다. 앞으로 맞이할 새해를 생각하니, 작품에 바칠 여력의 시간이 너무나 짧다. 마음이 조급해지고 두렵기도 하다. 청년시절, 전위 부대의 일원으로 한국 화단의 새로운 조형질서를 창조하겠다는 의욕을 가열하게 불태웠다. 혈기 왕성했던 도전의 시간이 어제 일만 같다. 지난 60여 년, 과연 나는 한국 모더니즘에 어떤 발자취를 남겼는가. 그 시간을 담담하게 되돌아본다. 작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내가 주역으로 활동했던 시대의 미술을 조명하는 두 개의 대규모 전시가 열렸다. 《한국 실험미술 1960-70년대》(서울), 《한국의 기하학적 추상미술》(과천).
이제 또 한 시대가 한국 현대미술의 역사적 평가의 대상이 되었다. 지난 시절을 회고하다 보면 과거의 평가도 중요하지만, 아직도 ‘현역 작가’인 나로서는 오늘과 내일을 마주하는 예술세계의 성숙, 천착으로 치닫고 만다. 젊은 시절의 전위 정신이 보편적 가치로 굳어갔지만, 다시 그것을 뛰어넘는 일이다. 한국적 미학의 근본을 현대화로 구현한다는 문제의식, 일관된 신념의 지속, 동시대미술로의 승화…
지난 60여 년 동안, 나는 ‘동시성(同時性, Simultaneity)’이란 주제로 작품을 지속해 왔다. ‘동시성’은 보이지 않는 피안의 세계를 드러내는 일이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눈에 보이는 ‘동일하고 균등한 시간과 공간’으로 표현하는 것이 내 회화의 목표다.
나는 1960년대에 오리진 그룹과 AG 활동으로 전위의 대열에 나섰다. 기존의 아카데미즘 구상미술에 항거하고, 앵포르멜 회화에서 탈피해 새로운 기하학적 추상회화를 발표했다. 특히 모더니즘 추상회화를 추구하면서도 앵포르멜 추상의 잔혹, 공포, 행위적인 조형 요소에서 탈피해, 정제된 새로운 서정적 추상을 추구했다. 무엇보다 우리의 정체성, 전통을 현대미술로 발현하는 작업에 몰두했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전통문화를 몸과 마음으로 자연스럽게 체득했다. 나는 순수 서울뜨기다. 대대로 이어온 한옥에서 성장했다. 한옥의 창호지문, 기하학적인 완자 문양의 창살, 달빛이 드리운 창호 문의 은은한 아름다움, 안방 건너 사랑방 창살에 발라놓은 창호지 흰색의 여유, 덧붙여 겹친 흰 한지의 유연함. 그뿐이던가. 집안 여기저기 놓인 도자기, 특히 백자의 형, 선, 색, 담담한 자태. 또 다락방 문풍지 벽에 붙어 있던 민화며, 앞마당 우물가 정원에 핀 갖가지 꽃, 장독에서 된장, 고추장 익는 냄새. 엄마의 다듬이 두드리는 소리, 산사의 풍경 소리, 물소리... 이런 우리 고유의 미의식이 내 작품에 귀의했다. 전통의 멋과 정신을 작품에 승화한 것이다. 내 그림은 담백한 정신의 표백이다.
세월의 연륜이 깊어질수록 작품도 변화한다. 회화 자체의 내재적 자율성이나 논리보다 자연의 이법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나는 근간의 작품에서 절제의 감성, 자기 회복의 감성, 자유의 감성으로 심미적이고 관조적 여운이 흐르는 ‘사색과 명상’의 세계를 추구하고 있다. 욕심이 없는 그림, 때 묻지 않은 정화된 그림. 이것이 내 삶이고 예술이길 바란다.
‘실버 작가’의 일상은 대단히 단조롭다. 아침에 눈을 뜨면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저녁에는 사색의 시간을 보낸다. 사회생활과 단절된 침묵의 일상이다. 나이가 들수록 좋은 점도 있다. 복잡한 세상사에서 벗어나 사심 없이 아름다움을 바라볼 수 있다. 이걸 '원숙'이라 하는가. 속취(俗趣)나 시기에 끼어들 틈이 아예 없다. 자적 속에 충만의 조건이 갖춰진 셈이다. 단순하게 시간의 현존을 만끽하는 여유는 덤이다. 여유와 자유! 그러나 예술은 무한한 도전의 길이다. 무한의 도전에 시간은 유한하니..., 숙제가 쌓인다. 무념, 무상, 침묵을 기본으로 삼아 자기완성의 길을 또 달릴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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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화 김환기 선생님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때 은사님으로 나에게 미술과 인성적 가치에 대해 많은 가르치심을 주신 분이시다.
선생님께서 상파울루 전에 참가 하시겠다고 하며 학교 교정을 떠나신 해가 1963년 내가 미술대학 4학년 되는 해이다. 나는 몇 친구와 선생님의 먼길 떠나시는 것을 배웅하려고 김포 비행장까지 따라 나섰고 화환과 마음의 안녕 인사를 드렸었다. 상파울루 전시 참석 후 다시 학교로 오시겠다고 환한 웃음을 짓고 떠나신 후 영영 안 오신지 어언 50여년이 지났다.
당시에는 유명한 국제전 참가가 매우 어려웠고, 더욱이나 현지 전람회에 참석은 상상하기도 힘든 때에 여러 고난을 극복하시며 훌쩍 떠나셨다. 전람회 참석 후 다시 오겠다고 하시였지만 이미 한국에 안 오시려고 마음 깊이 작정하셨고, 자신과 수화(樹話) 그림을 세계 속에 이상의 꿈을 펼치려고 도전의 역경의 길을 나섰던 것이었다.
기억되는 대학 시절 선생님의 모습은 깡마른 훌쩍한 키에 큼직한 검은 안경을 쓰고 수수하면서도 소박한 옷차림이었고 말수가 적은 아주 인자하신 분이셨다. 선생님 작업실이 학교 캠퍼스 내에 있었는데 작업실에는 조선시대 도자기와 목가구, 목기와 문구류가 많이 있었고 캔버스와 물감이 가득하였었다.
그리고 새, 달, 둥근 도자기, 산, 그리고 청색, 흰색, 점, 선으로 가득 채워진 작품들. 그리고 이곳 저곳에 물감과 종이 위에 낙서하듯이 드로잉 작업이 산재하여 있었다. 때로는 어쩌다가 물감 게는 일, 캔바스 만지는 심부름을 하면 그 때는 왜 그다지도 신났었는지 모르겠다.
돌이켜 보면 나는 대학 시절 참으로 훌륭하신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고 그 가르침은 오늘까지 작가로 가는 길에 큰 지침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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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석로 편저, 『내 그림을 말한다 1』, 서문당(2011) 수록
나는 ‘동시성(同時性, Simultaneity)’이란 일관된 주제를 50여년 동안 고집하며 지속적인 작품 세계를 추구하고 있다.
‘동시성’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것으로, 피안(彼岸)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것이 나를 통해서 동시에 발현될 수 있도록 하며 ‘동일하고 균등한 시간과 공간의 추구’이다.
나의 작품은 엄격한 조형적 질서와 조화의 공간을 탐구하는데, 물리적 시간의 행위나 정신성 등을 동시에 담아 내고자 하였다.
나는 1960년대에 오리진 그룹과 AG(아방가르드협회) 활동을 통해 기존 아카데미즘을 내세운 구상미술에 대한 항거와 추상미술인 비정형 앵포르멜에서 탈피한 새로운 차가운 기하학적 추상화 발표를 통해 한국 모더니즘 회화의 본격적 시작을 알리기 시작하였다. 그 당시에는 새로운 미술 탄생에 대한 질타와 몰이해, 무지, 편견이 매우 심하였지만 시대를 이끌어 가야한다는 예술가의 전위적 사명성을 갖고 우리의 정체성, 전통성을 잘 드러낸 현대미술의 발현에 몰두하였다.
나의 고향은 순수 서울뜨기이다. 대대로 이어온 한옥에서 유년기를 보냈고 그곳에서 우리 아이들이 자라났다. 한옥의 자연스러운 한지인 창호지 문, 기하학적인 완자 문양의 문창살, 달빛이 드리운 창호지 문의 은근 미. 그리고 안방 건너 방 사랑방 문창살에 발라 놓은 창호지 흰색의 여유, 덧붙여 겹쳐진 한지 흰색의 유연함.
집안 여기 저기 놓여진 도자기, 특히 백자의 형, 선, 흰색, 그리고 그 담담한 자세. 또 다락방 문풍지벽에 붙여있던 민화며 앞마당 우물가 정원에 핀 갖가지 꽃들, 장독가에 된장, 고추장 익는 냄새, 잊을 수 없는 엄마의 다듬이 두드리는 소리, 산사의 풍경소리, 바람소리, 물소리, 이러한 모든 것이 나에게 귀의되었다.
나의 회화에 내재된 색은 색상 자체보다 색이 걸러진 상태에 의한 표백되어진 담백한 정신이 담긴 색으로서 금욕적인 작업을 통해 우리 고유의 ‘한(恨)’에 대한 미의식이 나의 얼, 내 정신으로 승화되었다.
나의 초기 1960년대 기하학적 추상은 자신만의 조형언어를 실험하고 주장하면서 자신만의 독자적 세계를 구축하기 위한 도전의 시기로 구태한 시대의 미술을 뛰어 넘어 다양성을 추구하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즉 자연의 대상에서 완전히 벗어나 순수의 선과 형, 색채의 추구였다.
1970~80년대에 와서는 엄격한 조형적 구성으로 기하학주의가 만들어 내는 절제된 공간의 환원적 회화세계를 탐구하였다. 환원적이라 함은 사물의 본질이 원초적 근원으로 돌아가려는 회귀적 의미이다.
1990년대부터는 공간, 시간, 정신의 확산으로 초월적 존재를 확인하는 자유로운 표현으로의 전환을 갖게 된다. 즉 여백과 공간의 여유 속에 질서의 미를 유지하고 있다.
근간에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것들이 통합된 감성의 세계—절제의 감성, 자기 회복의 감성, 자유의 감성—등을 심미적이자 관조적 여운이 있는 ‘사색과 명상’의 공간 모색으로 절대적 미의 동시적 표현에 대해 심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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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미술』 제11권 2호(1999) 수록
1970년 첫 개인전 이래 어언 3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우리나라 현대미술의 상황이 숱한 변천을 겪어온 것과 마찬가지로 나의 작품 세계도 많은 변화를 거듭해왔다.
1970년을 전후한 시기는 고(故) 미술평론가 이일 선생의 지적대로 앵포르멜 이후 한국 현대미술의 한 획을 긋는 전환의 시기였다. 그 시기 나는 지금까지도 고집스럽게 지켜오고 있는 ‘동시성’이라 는 주제를 시작했다.
당시 내 그림에는 1963년 대학 2학년때 결성한 그룹 오리진(Origin)의 이념이 녹아 있었다. 우리는 50, 60년대를 지배했던 어둡고 음울하기까지 한 앵포르멜 미술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기하학적·구조적 패턴과 밝은 색을 사용하여 화단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기 위해 노력했다. 그룹을 결성하기 3년 전인 1960년에 4.19가 있었고 그후 사회 전체가 과거에서 탈피해 새로운 것을 만들어 보자는 개혁의 열기로 후끈 달아올라 있었으니 젊은 시절 우리의 드높았던 사기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으리라.
오리진 결성 1년 후 나는 군에 입대했다. 온실의 화초 같았던 내 성격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의식적으로 나를 거칠게 다루었다. 1967년 제대 후 나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본격적인 작가 의 길로 들어선다.
그때 내가 다시 시작한 미술운동은 AG 그룹의 활동이다. AG는 좀더 이념적 체계를 갖추어 우리 화단사에 종합적 미술운동을 구현하려 한 본격적 개혁운동이다. 우리나라 최초로 미술 무크지를 발행함으로써 70년대 ‘한국적 모더니즘’의 이론적 기반을 제시했고, 전국 각지를 돌며 지방 학생들의 참여를 유도하기도 했다. 이 운동을 통해 평면에서 탈피한 입체 및 오브제 도입 등의 혁신적 이념체계를 세울 수 있었는데, 이 어려운 길을 함께했던 동반자들이 오광수·이일·김인환 씨 등이다.
그 시절의 동지들 중에는 어느덧 이 세상을 떠난 사람도 생기고, 남은 사람들은 그동안의 세월 만큼 주름만 늘었다. 나이 들수록 해야 할 일들은 점점 많아지고, 그만큼 작품에 몰두할 수 있는 시 간은 줄어들고…. 그래서인지 작업실 문을 안으로 걸어 잠그고 전화도 받지 않으며 보내는 시간 또한 많아졌다. 캔버스와 나만의 절대적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30년 가까운 세월이라고는 했으나 사실 나의 ‘동시성’은 1990년을 전후해 가장 극심한 진통을 겪었다. 특히 지난 4, 5년간은 그동안의 틀에서 나 자신을 해방시키고자 전에 없는 갈등을 경험한 시기였다. 어쩌면 오랜 껍질을 벗고 새로운 삶에로 스스로를 열어젖히는 변신의 몸부림이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그 변신이라는 것이 완전한 탈바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또 변신에 따른 그 어떤 등이라고 했을 때 그것은 완전한 자기부정에서 오는 것이라기보다 지속과 변혁이라는 상충되는 요청에서 태어나는 필연적 창조의 과정이다. 상충되는 요청, 상호간의 긴장된 균형 또는 변증법적 통합에서 한 작가의 예술세계는 내적 일관성을 보장받을 수 있는 것이다.
지금 나는 그 결과물들을 세상에 내놓으려 한다.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화면을 채우고 있던 정사각형들은 흐트러지고, 차가운 듯하지만 온화하고 부드러운 색채는 더욱 중첩되어 그 경계를 허문다. 나의 이 변화를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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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간』 179호(1982) 「作家의 辯」 중 일부
나에게 있어서 회화 공간은 지각된 질서 속에서 무형, 무위로서의 상황이 아닌 정교하면서도 함축되어지고 조형 언어가 최대한 환원되어질 수 있는 상태로서의 표현이 되는 명증성(明証性)에 관한 문제에 대해 깊이 고려되어지면서 생성되어져 왔다.
임의의 색채, 형태, 선에 있어서 공간 속에 절대성을 통한 추출에 관해 항시 의문을 제기하여 왔고, 지각화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확인을 요구하며 반복되어진 이입 과정으로써 연계되어졌다.
들로네는 미학의 개념으로서 세브뢸의 법칙에 준한, 어떤 단순색이 본색으로서가 아닌 경우, 대기 속으로 사산(四散)하여 온갖 색을 만든다고 하는 공간으로서의 색채에 대해 구성적인 요인을 말하였지만 나는 보다 더욱 환원적 상태로서 표현될 수 있는 것의 색으로서 특성을 두고 추구했었다. 즉 색채의 평면성을 우선으로 한 가운데 색성(色性)을 최소한 건조시킬 수 있는 데까지 탈색화시켜 가면서 색면 분할로서 억제된 변조에 바탕을 두고 형성시켰다.
형태에 있어서도 통어(統御)된 해조(諧調)로서 공간 속에서 밀도있게 절대로서 병치될 수 있는 위치를 찾으려고 하였으며 이러한 양면성이 최소한의 관계로서 집약되기를 항시 추구하였다. 이러한 요소들이 존재방식에 있어서나 의미에 있어 지각된 양(量)으로서 공간 자체가 되고 조형 질서로서의 근원이 되기를 꾀하였고 체험의 전체를 함축성 있는 밀도로서 확장시켰다. 한때는 공간 구성을 위한 보편한 형태소, 색채소로서의 지각적 대상으로서 존재되어지기도 하였는데, 무의미에 대한 발견은 감각적 체험으로서 대응되어지면서 공간적 요소의 도입과 색, 형, 선의 부활로서 이른바 평면 속에의 지각화에 대해 적극적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관심은 증진적인 과정을 거치면서 단순한 체험의 유발에서 벗어나 자기규제에 따른 합리적이면서도 지적 과정과 동화될 수 있으면서도 명석한 화면 질서 추구에 진력하였고, 그 기본 조형언어로서 선, 형, 태, 색면을 등가적 요소로서 한 평면 안에 동시적으로 통합시키고 승화될 수 있도록 금욕적인 자세로서 일관하고 있다.
<동시성>이라는 동일한 세계를 추구하여 온 이래 완전하면서 정밀한 색, 형, 선에 의한 공간 추구는 일반적 조형 수단으로서, 물질로서의 한계를 벗어나 내재적 순수의식에 대한 가능한 밀접을 향해 접근할 수 있는 방식을 종합하도록 하였다.
조형어휘는 기본적인 상태의 것으로 환원되고 균형된 배합과 분할은 균형감이 있으면서도 개성화될 수 있도록 공간 감각을 특정시켜 주도록 하였는데 네모꼴, 또는 대소의 변화에 따른 사방형(四方形)의 절제된 일련의 형태들은 색상과 면분할을 달리하는 가운데 선적 요소를 특징지워주면서 여백으로서 공간 속에 비대칭적인 균형을 갖고 완전한 화해로서 결합되도록 하고 있다. 회화로서 순수형태, 색채를 추출하여 창조하려는 의지가 얼마나 어렵고 그 의미를 동시에 존재시켜 한 평면에 조형적 시도로서 도달시킨다는 것이 매우 고뇌스럽다는 것을 항시 염두에 두며 작품을 향한 작업을 한다.
기본적인 소명은 조형질서의 근원적 재확인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이러한 확인을 위해 자아 규제에 의한 통어된 언어로서 감각을 벗어난 정신적 감성으로서 환원되어지도록 균형있게 일관시키고 있다.
근간 집념하여 온 작품들을 통하여 이러한 기본적 명확성이 보다 보편성에서 벗어난 색대함수(色對函數)의 관계가 공간 조형으로서가 아닌 공간 지각화를 통한 지성적 요소로서 명증(明証)되어지고 감각적 체험의 리얼리티를 벗어난 감성 본질로서의 접근이 실현되도록 한 동시성의 확대와 심화로서의 추구에 두고 있다.